“평생 공장노동을 하며 살아온 한 시인의 ‘전태일되기’”
1. 이 책을 발행하며
표성배는 15세 소년공으로 출발하여 정년이 내일모레인 현재까지 공장 노동을 하며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번 신작 시집 <당신이 전태일입니다>는 그의 11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 역시 핍진한 노동 체험이 감동 짙게 묻어난 시들로 빼곡하다. 55편의 시를 4부에 엮었다.
표성배 시인은 줄곧 자신의 노동 체험을 바탕으로 시 쓰기를 해왔는데, 이 시집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시집의 표제 <당신이 전태일입니다>에서 보듯이 ‘전태일’이라는 한국 현대사에서의 상징적인 인물을 매개로 하여 오늘날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즉, 선각적 삶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전태일되기’로서의, 현재적 삶의 좌표를 돌아보는 층위에서의 시 쓰기로서 말이다. 시인은 마산창원 지역의 공단로에,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그늘 속에 한 점 한 점 세밀화를 삽입하는 작업으로서의 시 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시인에게 ‘전태일’은 “노동이 존중받는 / 노동에 귀천이 없는 나라 /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 근로 시간이 줄고 귀족 노조가 어떻고 하지만 / 여전히 알 수 없는 내일, /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노동에서 / 희망의 노동으로 / 조금씩 환경이 바뀔 때마다 / 그곳”(「당신이 전태일입니다」)에서 함께 싸우는 동료 노동자다. 시집 속에는 이 동료들이 개인으로 집단으로 무수히 호명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천만 노동자가 / 천만 노동자 손을 잡아주기만 하면 / 한 명 전태일이 / 천만 이천만 전태일이”(「너무 쉽게 잊는」) 될 텐데 아쉬움이 크기도 하다. 아쉬움은 힘겨움에서 온다. “백 년 이백 년 무너지지 않는 집이 될 것이라 / 환호했지만 김칫국을 너무 일찍 마셨다 / 환호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 주춧돌이 내려앉고 대들보가 흔들렸다 / (중략) / 대문이 굳게 닫힌 집에는 / 따뜻한 밥이란 없다 / 수많은 전태일이 만들고 지키고자 했던 / 노동조합 / 그 집이 위험하다”(「가장 따스한 집」)는 진단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일방적인 노동자 찬양을 충분히 넘어서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조합이 약화한 것은 자본 권력의 “죽은 전태일과 살아 있는 전태일을 / 갈라치기”(「전태일은 살아 있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이 조금씩 개선되면서 “조합원들이 공장 안 일보다 / 공장 밖 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노동자들이 / 꽃놀이패를 쥔 것처럼 어엿한 중산층이 되”면서 이제 공장에서 전태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전태일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철공소에는 근로기준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 현실의 불균형에 대해서는 다른 여타의 노동시에서도 많이 다루었다. 다만 표성배 시인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배면에 깔면서 일개 노동조합운동이 나아가 마산창원 지역의 노동운동으로, 나아가 한국 노동운동으로 이어진다는 신념과 그 현상을 그만의 시어들로 기억하고 노래한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표성배 시인의 이번 시집의 압권인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전태일 정신을 새기고 노동자 전위대로 / 대한민국 노동의 역사에 피를 바친 마창노련 / 지금도 마산 창원 하늘에는 / 마창노련 깃발이 핏빛으로 빛나”(「마창노련」)고 있음을 기록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마창노련 테러 사건」, 「통일중공업노조 테러 사건」, 「세신실업 구사대 퇴치 투쟁」, 「금성사 투쟁」, 「삼미특수강 투쟁」, 전태일 열사 사후 17년 만에 일어난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딸들아 일어나라」 등등 불러오며 그 투쟁의 의미를 “1970년 전태일의 염원이 전노협을 세웠다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 전노협 깃발 아래 / 나도 당당하게 서고 싶었다”고 노래함으로써 개인사-마산창원 노동운동사-한국 현대사로 확장하며 노동하는 삶에 대한 긍정과 자부가 있다는 점이다. “마창에는 3ㆍ15가 있고 / 김용실 김영준 김영호 강윤기 김주열이 있고 / 4ㆍ19가 있고 10ㆍ18이 있고 / 팔칠 년 칠팔구가 있고 마창노련이 있고 / (중략) / 전태일 앞에 전태일 / 전태일 뒤에 전태일이 있는 / 마산창원, / 나는 마산창원이 자랑스럽다”(「마산창원이 자랑스럽다」).
2. 지은이 소개
표성배: 시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95년 제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침 햇살이 그립다, 저 겨울산 너머에는, 개나리 꽃눈, 공장은 안녕하다, 기찬 날, 기계라도 따뜻하게, 은근히 즐거운, 내일은 희망이 아니다, 자갈자갈, 당신은 누구십니까 등이 있고, 시산문집으로 미안하다가 있다. 2021년 제7회 <경남작가상>을 받았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5
제1부
당신은 아프다 12
그동안 14
가장 따스한 집 16
전태일은 살아 있다 18
당신이 전태일입니다 20
제2부
1994년 11월 13일 24
1970년 11월 13일 26
마산수출자유지역 28
지금도 철공소에는 30
전태일을 만나다 32
노동자는 노동자다 34
노비산에서 별을 보다 36
나는 노동자다 38
당신의 별 40
공짜는 없다 42
전태일은 이미 내 옆에 있었다 44
문학은 개뿔 46
노동자와 노동시 48
제3부
전설 같은 이야기 52
독수리 오형제 54
밥그릇과 나란히 56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다 58
노동자라고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60
내가 아는 전태일은 여자였다 62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64
비정규직 66
황무지 68
지금도 우기고 있다 70
전태일이 보이지 않았다 72
날치기 74
소사장 76
희망이라는 말 78
스물세 명 80
너무 늦게 알았다 82
안전사고가 이름처럼 당당한 나라 84
너무 쉽게 잊는 86
길은 말하지 않는다 88
제4부
마창노련 92
마창노련 테러사건 94
통일중공업 노조 테러사건 96
딸들아 일어나라 98
세신실업 구사대 퇴치 투쟁 100
금성사 투쟁 102
삼미특수강 투쟁 104
역사의 수레바퀴 106
한일합섬 108
이영일 110
임종호 112
정경식 114
배달호 116
꽃이 된 이름 118
반성문 120
나비 효과 122
마창노련문학상 124
마산창원이 자랑스럽다 126
ㅣ에필로그ㅣ 129
4. 본문에서
<지금도 철공소에는>
골목을 돌아서니
또, 골목이다 한정 없이 캄캄한
1979년 열다섯 살 키가 다 자라기도 전에
나는 철공소에 취직했다
1970년 서울 평화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턱이 없는
빡빡머리 시다들 올망졸망
악다구니 속에서 기술을 익히려 애썼다
좀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공장으로 옮기는 게
유일한 목표였던 철공소,
1981년 형들이 어깨를 두드려 주어
야간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선생님들이 교과서 내용도
잘 가르쳐 주었지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형들과 누나들을 따라다니며
교과서 안 공부보다
교과서 밖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그러자 멀리 있는 별들이 점차 가깝게 보였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전태일이 분신까지 했다는데
목숨까지 바쳤다는데
그의 목소리가 이리도 생생하게 들리는데
지금도 철공소에는
근로기준법이 그림의 떡이다
* * * * * *
<한일합섬>
1967년 1월 마산에 하루 7.5톤
아크릴을 생산하는 한일합섬이 준공되고
1974년 4월 국내 기업 최초로
종업원을 위한 실업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어린 여자애들이 평화시장으로 몰려가
봉제공장 노동자가 된 것처럼
마산 한일합섬으로 몰려들었다
한일합섬에는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전태일은 없었다
내가 낮에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 고등공민학교를 다닌 것처럼
아내도 낮에 한일합섬에서 일하고
밤에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다녔다
내가 밤에 공부하기 위해 낮에 더 애썼듯
아내도 밤에 공부하기 위해 낮에 더 애썼다
낮에는 기계 앞에서 두 눈 크게 뜨고
실과 원단과 관리자 폭언과 씨름하고
밤에는 꾸벅꾸벅 졸면서 내일을 꿈꿨다
그 꿈을 먹고 공장은 자라
김해에서 수원에서 구로에서 대구에서
수출탑을 쌓았으나
그만큼 마산 앞바다는 썩어 갔고
공든 탑은 여공들의 내일이 되지 못했다
1998년 공장 터를 주거와 상업 용도로 변경하고
2004년 돈 보따리를 안고 미련 없이
마산을 떠났다
그 자리에 50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섰다
어린 여자 노동자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지만
높이 솟은 아파트 앞을 지날 때마다
아린 추억을 잘라내고 있다
* * * * * *
<마산창원이 자랑스럽다>
마창에는 3ㆍ15가 있고
김용실 김영준 김영호 강윤기 김주열이 있고
4ㆍ19가 있고 10ㆍ18이 있고
팔칠 년 칠팔구가 있고 마창노련이 있고
열사 정경식이 있고 이영일 임종호가 있고
배달호가 있고 노동 야학이 있고
가톨릭여성회관이 있고
노동자 학교가 있고 양산박이 있고
대문집이 있고 막걸리 장단이 있고
통일중공업 노조가 있고
대림자동차 대원강업 경남금속 한국TC
금성사 삼미특수강 삼화기계 한국웨스트
한국수미다전기 한국산본 한국산연 효성중공업
세신실업 삼미금속 두산유리 한국중공업
동서식품 한국화낙 현대정공 기아중공업……
두산기계가 있고
철공소가 있고 한일합섬이 있고
창원대로에 불붙은 드럼통이 있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있고
삼각지 공원이 있고 마산역 광장이 있고
육호광장 불종거리 창동 어시장
경남대학교 남성동파출소
양덕파출소 북마산파출소가 있고
무학산이 있고 팔용산이 있고 천주산이 있고
어린 노동자가 있고
어린 노동자 손을 잡아주던 형들이 있고
어김없이 전태일이 있고
전태일 앞에 전태일
전태일 뒤에 전태일이 있는
마산창원,
나는 마산창원이 자랑스럽다
5. 시인의 말
전태일은 누구의 전태일이 아닙니다.
모두의 전태일입니다.
6. 추천사
소년 시절부터 정년의 시간을 코앞에 둔 현재까지 공장 노동을 하고 있는 표성배 시인은 주로 그 경험에 의지하는 시들을 써왔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한국 노동시에서 담보력이 약한 현장성의 핍진함이라는 차원에서 독보적인 좌표를 점하고 있다. 이 위상이 종종 큰 목소리를 내는 노동시에서 의심과 미움을 받게 되는 원인인 편협함을 해소시킨다. 그는 고통스런 삶을 말하는 것은 아직 문학이 아니라는 진리를 꿰뚫고 있는 듯하다. 그 정신은 자신의 삶은 가난하지만 문학의 부유함을 위해 그 모든 의미와 가치들을 정립하여 보편 역사 위에 세우고자 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자신의 개인사를 마산창원 지역의 노동운동사에,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되비춤과 상호 투사를 통해서 견실한 문학적 진정성을 획득하고 있는 이번 시집은 고난에 찬 자신의 삶에 스스로 고귀한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조기조(시인)
표성배 시인의 어법과 표현을 빌려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표성배는 누구의 표성배가 아니라, 시를 쓰는 노동의 표성배이고 시집을 내는 노동자의 표성배이다. 그에게 시는 단순한 시가 아니고, 시집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다. 그에게 시는 노동의 망치 소리와 용접 불빛이고, 시집은 노동자의 공장이다. 그는 땀과 눈물과 피가 흐르는 그의 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오늘도 노동자의 공장인 시집 안에서 노동의 망치 소리와 용접 불빛을 내기 위해 걷고 뛰고 숨 쉬고 있다.’ 이 표성배 시인에게 어느 독자인들 “당신이 전태일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종오(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