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얻은
각성과 회심의 시적 통찰”
1. 이 책을 발행하며
변경섭 시인의 신작 시집 <다시 사람에게 묻다>가 출간되었다. 시인의 제4 시집이다. 시인은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다 몇 년 전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 정착을 했다. 도회의 세속적인 세계에 익숙해진 삶의 다양한 의미와 가치, 욕망 등에서 뭔지 모를 갈증에 시달리며, 왠지 ‘공허’하고 ‘허기’가 느껴졌는데, 그런 삶이 ‘하도 애달파’ 산골 마을 숲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돌멩이와 나무와 바람’과 어울려 살면서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영적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적 삶에 대한 탐구와 성찰을 통해 얻어낸 시적 성과를 이번 시집에 담아내게 된 것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진정한 자아 성찰은 자연에서 배우고 깨닫는 것임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 재앙이나 그간 겪었던 사스나 코로나19 등 전염병의 창궐 등 위험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도, 결국은 개인의 의식과 삶의 태도를 바꾸는 회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또다시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 구조나 문명의 전환도 그 출발은 개인의 각성과 회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변화된 개인이 모여 마침내 사회 구조와 문명의 전환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송곳이 날카롭고 작은 끝이 먼저 뚫고 들어가 큰 구멍을 내듯, 출발은 작은 일상의 구체적 삶에서 시작되어야 지속성을 가져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다.
시인의 이런 회심의 구체적 일상의 적용을 시 「敬(경)」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物(물)을 아끼고 / 사람을 사랑하면 /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 자명한 이치다 // 무더운 여름날 참나무 /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다가 / 고마운 마음에 / 나무를 안아줬다 // 나무를 안고 이파리 사이 하늘을 보다가 / 내 마음이 푸른 꿈꾸는 하늘처럼 고요해져서 / 세상 속에서 가져온 慾(욕)을 하나씩 덜어내고 /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층 자유로워져 있었다 -(「敬」 전문)
시인이 이 시집에서 보이는 가장 큰 미덕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섬세한 모습을 눈여겨보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자세와 그를 통한 자아 성찰에 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시가 바람에 쓰러지지 않은 채 ‘뿌리 박은 자작나무’처럼 의연하지 못하고, ‘세상의 떠도는 말’처럼 바람이 되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한다(「부는 바람」). 또 ‘자본의 세상’에서 ‘효용 가치가 떨어져’ 도태되는 시인을, 감나무에 밀려 이름마저 사라져버린 고욤나무와 동일시한다(「고욤나무의 추억」). 그러면서도 감나무는 고욤나무 없이는 대를 이어갈 수 없다. 고욤나무를 밑나무로 해서 감나무 가지를 잘라다 접을 붙여야만, 고욤나무 엄마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아 튼실한 감나무로 거듭나게 된다. 따라서 감나무든 고욤나무든 또 바람과 자작나무든 다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고 또 감당하는 역할이 다를 뿐으로, 다 필요한 만큼 저마다 대등하게 존귀하다는 통찰이 이 시집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시인의 전언이 아닐까.
2. 지은이 소개
변 경 섭: 1961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젊은 시절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하며 살았다. 한때 서울에서 환경회사에 다녔고 지금은 강원도 평창군 대미산 자락 산골 마을에 내려가서 자연을 벗 삼고 시와 소설을 쓰며 산다. 최근에는 자연과 사람, 환경 및 기후 위기, 생명의 문제 등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며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새는 죽었다>, <자작나무 숲에 눈이 내린다>, <목발에 대한 생각>을 냈으며, 장편소설 <종태>, <누가 하늘다람쥐를 죽였나?>, 소설집 <눈사람도 사랑하네>와 에세이집 <서리꽃 피고 꽃 지고>를 펴냈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5
제1부
자연의 소리를 들을 때 13
족도리풀꽃 15
해쑥 향기 16
꽃이 지는 건 18
풀과 마음 20
인동초가 살아가는 법 21
창밖을 보다가 언뜻 22
향기 24
피고 지고 25
앉은 자리 26
무제 28
敬 30
점 31
잡초 32
숲처럼 34
제2부
풀잎에 베인 상처 39
어느 발자국 41
걷다가 42
빗소리 44
사람의 눈 46
안녕! 48
나목 50
바람 부는 날 나뭇잎 룽다 52
봄비 오는 날 54
사과꽃 56
돌나물 58
계단을 오를 때마다 60
왁자지껄 62
가을의 소리 64
해의 운행 66
나 67
제3부
꽃길 71
화두 73
멸종 위기 74
빈집 75
빈집 2 76
빈집 3 78
부리를 씻는다 79
장작 80
꽃과 뱀 2 82
단풍처럼 지고 싶으냐? 85
족도리풀과 애호랑나비 86
풀 88
멈춰서 사랑하라 90
민물매운탕 92
한파주의보 95
제4부
부는 바람 99
겨울 준비 품앗이하는 날 100
가을, 사마귀 102
백숙을 먹을 때 104
복사꽃 아래에서 106
으르렁 으르렁 108
피와 칼과 눈물 111
고욤나무의 추억 112
어머니는 늘 114
곡교천 버드나무숲 116
지상에 내린 별 118
산속에 살므로 120
고라니 소리 122
달맞이꽃 123
ㅣ해설ㅣ 김영호 125
4. 본문에서
<빗소리>
비 오는 소리 오랫동안 듣지 못했네
아파트 시멘트벽 속에 갇혀 있기도 했고 삶이
빗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지
뭐 이룰 게 있다고 애면글면 살다가
문득 부질없다 느껴 훌쩍 떠나버렸네
언제든 찾아도 반갑게 받아줄 곳
마음의 안락과 여유가 있는 곳
이제 나무와 풀과 새와 함께 사니
내 귀가 다시 열렸네
내 어릴 적 처마 밑에서
낙숫물 소리 귀 기울이던 마음으로 돌아가니
이슬비 오는 소리
보슬비 오는 소리
소나기 소리
천둥 치며 폭우 쏟는 소리
모두 다 말 걸어오네
손에 움켜쥘수록 손에 쥔 것에 마음 빼앗겨
오시는 빗소리 듣지 못하리
아이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잔잔하다가 때로는 심술 사나운 빗소리와
영원히 이야기 나누지 못하리
* * * * * *
<족도리풀꽃>
숲속 큰 나무들 밑
낙엽 더미 살짝 들어 올려
부끄러운 듯이
고개 숙여 피는 꽃
무릎 꿇고 앉아 고개 숙여
낙엽 더미 살짝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야
볼 수 있는 꽃
나도
족도리풀꽃도
고개 숙여야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것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서로 인정하는 것
5. 시인의 말
산속에 살며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나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세상은 흐르고 변해갑니다.
삶이 그 속에 있습니다.
결국 또 사람입니다.
늘 내게 사랑만 주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의 형제자매, 가족들에게
이번에는 내가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네요.
6. 추천사
<누가 하늘다람쥐를 죽였나?>를 통해 작가를 만났기에 자연을 주제로 글 쓰는 소설가인 줄만 알았다. 앞서 여러 시집을 냈던 생태 시인임을 이번 시집을 읽으며 알아차렸다. 노자를 좋아했고, 동학의 경물(敬物)에 심취했으며, 최근 다석 사상까지 접하며 지경을 넓혀온 그의 호학(好學) 정신이 그의 문학을 생태 영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아주 쉽고 편안한 언어를 갖고서 자연 생명에 무지했던 인간 마음 깊은 곳을 자극한다. 사람이 희망(향기)인 이유를 자연과의 관계 맺는 힘에서 봤던 까닭이다. 그는 자연을 보고 인간을 표현했고 사람을 보며 자연을 다시 읽곤 했다. 자연은 그에게 다른 차원의 인격이었다.
근자에 자연(사물)의 본성과 이렇듯 깊이 교감하는 생태시를 본 적이 없다. 읽지 못한 그의 이전 시집도 찾아 읽어야 할 것 같다.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한 변경섭 시인의 이번 시집이 멸종 위기에 처한 인류세에 희망을 선사할 것이다. -이정배(종교철학자, 현장아카데미 원장)
“시인의 삶이 그의 시”(「피와 칼과 눈물」)라면 변경섭의 시는 마른 대지를 서서히 적시는 빗물과도 같다. 노쇠한 남편이 마지막 사랑의 징표로 처마 밑에 빼곡히 장작을 쌓아둔 집을 지나며 아궁이에 불이 꺼질 때쯤 당신 보러 가리라, 한다. 뙤약볕과 폭풍우에도 굽은 허리일지언정 굳건히, “안간힘 쓰며”(「걷다가」) 이름 모를 생명들과 함께 목발을 짚으며 걷고 또 걷는다. 족도리풀꽃과 해쑥과 고라니와 인동초가 관계에서 더 빛을 발한다. 마을을 넘어 세상에 퍼지는 詩밥 한 상이 풍성하다.-고영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