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심에 이른 시인의
존재론적 탐구로서의 삶과 죽음의 노래”
1. 이 책을 발행하며
하종오 시인은 41번째 시집은 <세 개의 주제와 일흔일곱 개의 서정>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세 가지 주제로 쓴 연작시 77편을 담은 시집이다. 1부에는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라는 부제를 붙인 31편의 연작시를, 2부에는 ‘아내에게’라는 부제를 붙인 29편의 연작시를, 3부에는 ‘당신과 나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붙인 17편의 연작시로 엮였다. 올해로 70세, 종심(從心)에 이른 하종오 시인은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신을 시적 대상으로 한 존재론적 탐구의 결실을 담아낸 시집이다.
연작시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에서는 문자 그대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하여 사유하는 시편들인데, 시인은 부모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아버지 어머니는 말하려고 해도 다 표현될 수 없는 실체이고, 말할 수 없어도 다 표현되는 존재이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다 표현되었으나 말한 이후에 다 표현되지 못하는 존엄”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부모를 “첫째가는 인간이라면, / 인류를 아우르는 인간이라면 / 아버지 어머니밖에 없다”(「첫째가는 인간」)고 노래한다.
연작시 ‘아내에게’에서는 아내와 시적 화자는 각각 홀로 태어나 함께 살지만 또 각각 홀로 죽는 존재임에 대해서 사유한다. 이에 대해 시인은 “아내도 나도 사라진 뒤, 아내와 내가 살았던 그 시간과 그 장소에 어떤 부부가 와서 살다가 사라질 것”이며, “어떤 부부가 사라진 뒤, 또 그 시간과 그 장소에 다른 부부가 와서 살다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러한 일이 누구나 홀로 태어난 이유이고, 함께 산 이유이며, 또 홀로 죽는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명편의 시를 남기게 한다.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 젊은 아내가 걸어왔다 /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 늙은 내가 걸어갔다 /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 달밤이 더 환해졌다 //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 젊은 내가 걸어갔다 /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 늙은 아내가 걸어왔다 /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 달밤이 더 환해졌다 // 젊은 나와 젊은 아내는 / 달이 뜨기 전에 달이 뜨기 전에 / 같이 걸어 다닌 적 있었고 / 늙은 나와 늙은 아내는 / 달이 진 후에 달이 진 후에 / 같이 걸어 다닌 적 있었다 / 그렇게 같은 시절엔 / 달밤에 잠들어 백 년을 살았다”(「달밤-아내에게」).
연작시 ‘당신과 나를 위하여’에서 시인은 “태어나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았던 당신과 나, 그 다음 태어난 후 비로소 존재하게 된 당신과 나, 끝내는 죽어서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되는 당신과 나의 생과 사”를 사유한다. 즉, 시인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의 시들이다. “시 속의 당신과 나는 늘 갈등하면서 또는 모순되면서 또는 합일하면서 살아온 자들의 이중이기도 하고 양면이기도 하다. 당신과 나는 기실 ‘나’ 혹은 ‘당신’이라는 한 사람”인 것이다. 이 연작시에서는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사유가 담겨 있다. 이 당신과 나로 분리하여 사유되는 ‘이중과 양면’은 “내가 당신이 죽기 전에 나는 죽고 싶지 않다”(「죽음의 완성-당신과 나를 위하여」)라는 시구로 자신의 의지와 행위가 도저한 합일에 이르기를 꿈꾼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태어남과 사라짐은 자신의 뜻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어서 “오늘 당신과 내가 그렇게 그렇게 지내다가 / 내일이나 모레 당신이 죽는다면 / 그것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나한테 생기는 새로운 순서, / 나는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 당신이나 나나 죽는 날을 미리 알고 있으면 좋겠다”(「생과 사의 순서-당신과 나를 위하여」)라고 토로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시인은 다시 한번 “시간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 장소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 당신과 나는 원해서 / 안락사한다 / 정말로 안락사했는지 / 당신과 내가 서로를 확인”(「안락사-당신과 나를 위하여」)하겠다는 선언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아직 합법적이지 않은 안락사가 머지않아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내보이기도 한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전해보고자 하는 주제인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존재론적 탐구는 때로 애절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면서 아름답기도 하다. 오래전에 ‘태어나지 않고 살았던 세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추념하고, 지금 함께 이 세상에 머물고 있으나 언젠가 각자 ‘태어나지 않고 살았던 세상’으로 떠날 아내와 자신을 위로하는 시는 더욱 그러하다.
2. 지은이 소개
하종오 시인: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넋이야 넋이로다>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정>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어미와 참꽃> <깨끗한 그리움> <님 시편> <쥐똥나무 울타리> <사물의 운명> <님> <무언가 찾아올 적엔> <반대쪽 천국> <님 시집>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제국(諸國 또는 帝國)> <남북상징어사전> <님 시학> <신북한학> <남북주민보고서> <세계의 시간> <신강화학파> <초저녁> <국경 없는 농장> <신강화학파 12분파> <웃음과 울음의 순서> <겨울 촛불집회 준비물에 관한 상상>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신강화학파 33인> <제주 예멘> <돈이라는 문제> <죽은 시인의 사회> <세계적 대유행> <악질가>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등이 있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5
제1부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전생, 생후 16
첫째가는 인간 22
나는 아버지, 나는 어머니 24
낙숫물 사념 26
모독하는 짓 28
시간에 맞추어 30
주인 되지 않으려는 마음 32
가문 날 물 한 잔 34
해독 36
먹일 궁리 38
도달 40
무언 42
일 한 가지 44
이를테면 이런 경우 46
육안과 심안과 천안 48
물리적 정서적 50
전철 52
시절들 54
미소와 발짝 소리와 동작 56
최초의 인류 58
광경들 60
노릇 62
전능 64
장소 66
처지 68
모두 70
명실공히 72
다른 점, 같은 점 74
거생과 종생 76
사실과 실감 78
저세상 80
제2부 아내에게
살았으매 그 시간 그 장소 84
달밤 86
장마 88
대화 90
말소리와 웃음소리 92
방 94
지난여름들 96
일상 98
맞은편과 옆자리 100
꽃 도둑들 102
열매의 주인 108
낙엽의 주인 109
축경과 차경 110
설경놀이 112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 114
소외를 견디는 시간 116
고통을 말할 때 118
자신을 품는 장소 120
별것 아니라는 느낌 122
늙어가는 날들 124
방 안 산책 126
각자 일하는 장소 128
서로 통하는 시간 130
해 지기 전에 132
수저질하는 시간 동안 134
한 해가 저물던 어느 하루 136
눈이 내려 쌓인 점심때 138
햇볕이 내리는 아침나절 140
각자에게 속한 사람 142
제3부 당신과 나를 위하여
존재 146
이 시간과 이 공간 164
나중까지 166
이 세상 밖, 이 세상 안 168
단둘의 식사 170
헌옷 172
맛 174
존재라는 것들은 176
장소들 178
저세상에 가기 전에 180
생과 사의 순서 182
생으로부터 멀어지는 나이에 187
연명 189
존엄한 생사 191
당신기 193
죽음의 완성 203
안락사 209
4. 본문에서
<먹일 궁리>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자식을 분가시키고 나서부턴
쌀을 씻거나 설거지하다가
나는 뭉클해지곤 한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무엇을 해서 나를 먹이셨는지
어떻게 해서 나를 먹이셨는지
나의 배를 불리기 위해
한 끼니를 마련하기 위해
지붕 위로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시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창밖에서 선회하는 새를
보시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대문을 열면 출발하는 길에 대해
말하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적이 잦았을 뿐더러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말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심안이 향하는 쪽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고
입 안에서 맴도는 말거리를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젊은 아버지 어머니였을 적엔
자식에게 먹일 궁리만 했고
늙은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나서부턴
나는 돌이켜 살피고 있다
무엇을 해서 자식을 먹였는지
어떻게 해서 자식을 먹였는지
* * * * * *
<달밤>
─아내에게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젊은 아내가 걸어왔다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늙은 내가 걸어갔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달밤이 더 환해졌다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젊은 내가 걸어갔다
달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늙은 아내가 걸어왔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달밤이 더 환해졌다
젊은 나와 젊은 아내는
달이 뜨기 전에 달이 뜨기 전에
같이 걸어 다닌 적 있었고
늙은 나와 늙은 아내는
달이 진 후에 달이 진 후에
같이 걸어 다닌 적 있었다
그렇게 같은 시절엔
달밤에 잠들어 백 년을 살았다
* * * * * *
<나중까지>
─당신과 나를 위하여
당신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함께 죽기를 원했던 적이 있다
햇빛을 따스하게 하던 당신의 눈빛과
하늘을 넓게 펴던 당신의 손가락과
공기를 맑게 하던 당신의 숨결을
내가 탐닉했던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예전의 당신을 요즘으로 데려와서
요즘의 당신과 나란히 세워놓은 나는
햇빛이 너무나 따스해서 두 눈을 살짝 감다가
하늘이 너무나 넓어서 두 손을 활짝 펴다가
공기가 너무나 맑아서 들숨 날숨을 크게 쉬다가
당신들에 매료당한다
예전의 당신은 젊디젊고
요즘의 당신은 늙어 있지만
당신들은 한 사람의 당신,
나는 햇빛과 하늘과 공기를 여한 없이 취했으니
당신이 나보다 오래오래 더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죽고 나면
예전의 당신을 예전으로 데려다주고
요즘의 당신은 요즘으로 돌아와서
나중까지 당신인 채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5. 시인의 말
내 나이 70, 종심(從心)의 해에 ‘아버지 어머니’와 ‘아내’와 ‘나’를 사유한 연작시를 모아 시집을 낸다. 각각의 시는 연작 제목 안에서 연결되나 독립적인 작품이다. (……)
이 시집으로 오래전에 ‘태어나지 않고 살았던 세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추념하고, 지금 함께 이 세상에 머물고 있으나 언젠가 각자 ‘태어나지 않고 살았던 세상’으로 떠날 아내와 나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