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소개
도서출판 b에서 박인성(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법상종 논사들의 유식사분의 해석(法相宗諸論師唯識四分義解釋)』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규기․혜소․지주․도읍 등 중국 법상종의 논사들, 그리고 선주․중산 등 일본 법상종의 논사들의 사분의를 탐구하고 있다. 현장이 편집해서 한역한 호법의 『성유식론』을 주석해서 규기가 『성유식론술기』와 『성유식론장중추요』를 저술하고, 또 이 규기의 저술을 해독하며 일본에서는 사분의를 궁구하는 선주의 『유식분량결』과 중산의 『사분의극략사기』가 나오게 되었다. 이 중국과 일본의 유식논서들에 담겨 있는 호법의 유식사상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내려오지 않는다. 화엄, 천태, 선, 기신론 사상 등 중국인들이 창시한 불교 전통 속에서 인도의 호법의 유식사상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법상종 논사들의 유식사분의를 연구하면서 일본 법상종의 유식에 주목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일본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호법 유식의 전통이 풍요롭게 내려오는 나라이다. 일본 유식을 연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일본 유식을 연구한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호법 유식을 계승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유식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법과 현장의 유식은 현대의 현상학자 이조 케른이 설파했듯이 후설의 현상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저자는 호법과 현장의 유식 용어들을 후설의 현상학과 접목하면서 오늘날의 언어로 해석하고, 그러면서 더 깊이 더 넓게 유식을 사유하는 길을 모색해 가고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새롭게 펼쳐질 사유의 흐름에 있어서 출발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는 뜻의 이 말에서 ‘만들었다’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뜻이 아니라, 현상학 용어를 빌려 말하면 ‘구성했다’는 뜻이다. ‘구성한다’는 것은 ‘나타나는 것들을 그대로 나타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식불교에 따르면, 유식(唯識)이란 말이 보여주듯이 모든 것은 마음에 나타난 것이다. 가령 우리 인간들이 책상을 볼 때 책상은 네모나고 누런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고양이나 개 등 다른 종의 동물들이 볼 때는 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인간한테 나타나는 책상이 우리 마음 바깥에 존재하고, 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책상을 고양이나 개가 본다고 생각하는 습벽이 있다. 그럴 때 고양이나 개의 마음 바깥에 우리 인간한테 나타나는 칠판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유식불교에서는 그와는 다른 사유를 한다. 인간들은 모두 인간이라는 같은 업보(業報)를 받았기에 각각의 인간들한테 유사한 칠판들이 나타나고, 개나 고양이 등 다른 동물들한테는 각각 다른 업보를 받았기에 다른 유사한 칠판들이 나타난다고 사유한다. 유식불교에서는 이렇게 동물의 종마다 가령 책상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즉 책상은 오직 마음에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분설을 제창하고 있다. 사분이란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을 가리킨다. 지각할 때든, 기억할 때든, 상상할 때든 마음이 작용할 때는 일식(一識) 또는 일심(一心)이 이렇게 넷으로 분화한다. 이 중 상분은 흔히 쓰는 말로 바꿔보면 보여지는 쪽 곧 객관, 견분은 보는 쪽 곧 주관을 가리킨다. 철학 용어를 써서 바꿔보면, 상분은 대상, 견분은 작용,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자기의식이다. 일식 또는 일심이 이렇게 분화해서 대상과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기에, 즉 식 또는 심을 벗어나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에,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이다.
인도불교사에서 불교교학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등장한 호법의 유식을 따르는 중국과 일본 법상종의 논사들은 일식 또는 일심이 넷으로 분화되기에 우리가 세계 속에서 세계 속의 사물들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음 바깥에 가령 책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책상이 우리 마음에 자극을 주어 우리 마음에 표상이 생기고 이 표상을 책상으로 인식한다고 하는 식으로 사유하지 않고, 우리의 지난 생의 업의 세력이 우리의 몸과 세계를 만들고 이 몸과 세계가 전개되면서 이 생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험들을 해나간다고 사유하는 것이다.
■ 저자 소개
박인성 (朴仁成)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부 교수이다.
옮긴 책으로 『불교인식론 연구』, 『현상학이란 무엇인가-후설의 후기사상을 중심으로』, 『유식사상과 현상학-사상구조의 비교연구를 향해서』, 『현상학적 마음-심리철학과 인지과학 입문』, 『유식삼십송풀이-유식불교란 무엇인가』, 『아비달마구사론 계품-산스끄리뜨본·진제한역본·현장한역본』, 『반야심경찬』, 『중변분별론소』, 『중과 변을 구별하기-산스끄리뜨본·한역본』, 『중론-산스끄리뜨본·티베트본·한역본』, 『니야야빈두/니야야빈두띠까-산스끄리뜨본』, 『유식삼십송석-산스끄리뜨본과 티베트본의 교정·번역·주석』, 『쁘라산나빠다-나가르주나 중론에 대한 산스끄리뜨 주석』, 『나가르주나-중론의 산스끄리뜨 원본 및 주석』 등이 있고, 논문으로 「5종변계에 대한 진제의 해석」, 「의식의 솔이심에 대한 규기의 해석」, 「유식이십론 게송 10에 대한 규기의 해석」, 「대승장엄경론의 아홉 심주에 관한 연구」, 「문장의 의미파악과 5심에 대한 태현의 해석」 등이 있다.
2014년 제2회 대정학술상을 수상했다.
■ 차례
ㅣ약호ㅣ 11
ㅣ들어가는 말ㅣ 13
1. 상견동별종문
Ⅰ. 『술기』의 상견동별종론 29
1. 식소변인 견분과 상분․29 / 2. 상견동종․32 / 3. 상견별종․34
Ⅱ. 『추요』의 상견동별종론 38
1. 상견동종․40 / 2. 상견별종․49
2. 삼류경문
Ⅰ. 상견동종별종론과 「삼장가타」 59
1. 상견동종별종론․59 / 2. 「삼장가타」․61
Ⅱ. 「삼장가타」에 대한 해석 63
1. 제1구에서 제3구까지․63 / 2. 제4구․77
3. 행상문 1
Ⅰ. 견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 90
Ⅱ. 상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 93
Ⅲ. 견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과 상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의 화회 99
4. 행상문 2
Ⅰ. 행상에 대한 규기의 두 가지 해석 112
1. 견분을 행상으로 보는 첫째 해석․112 / 2. 상분을 행상으로 보는 둘째 해석․118
Ⅱ. 첫째 해석과 둘째 해석에 대한 지주와 도읍의 견해 125
1. 지주의 견해․128 / 2. 도읍의 견해․130
Ⅲ. 『유가사지론』의 ‘소연은 동일하고 행상은 동일하지 않다’와 『성론』의 ‘소연은 상사하고 행상은 각각 다르다’에 대한 해석 133
1. 중산의 해석․134 / 2. 규기의 해석과 중산의 풀이․140
5. 사분상연문
Ⅰ. 염위(染位)에서의 4분상연 153
1. 첫째 논사의 견해․154 / 2. 둘째 논사의 견해․158
Ⅱ. 정위(淨位)에서의 4분 상연 160
1. 동체 4분의 경우․160 / 2. 동취이체의 경우․167
6. 삼량분별문
Ⅰ. 4분과 3량 간의 관계 176
Ⅱ. 견분은 3량에 통하지만 자증분은 3량에 통하지 않는다 182
Ⅲ. 견분의 3량은 동시에 생할 수 없지만 자증분의 현량과 견분의 3량은 동시에 생한다 185
Ⅳ. 견분의 3량이 동시에 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논파함 ① 188
Ⅴ. 견분의 3량이 동시에 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논파함 ② 194
7. 능연소연문
Ⅰ. 상분의 심과 견분의 심 203
1. 상분의 심은 연려할 수 없다․204 / 2. 견분의 심은 연려할 수 있다․208 / 3. 견분이 이전의 심을 연려할 수 있는 것은 자증분 때문이다․212
Ⅱ. 능연의 용의 분한 214
1. 증자증분은 견분을 연려할 수 없다․214 / 2. 능연의 용에 분한이 있는 것은 상박과 견박 때문이다․218 / 3. 4분은 늘어남과 줄어듦이 없다․220
Ⅲ. 4분의 비즉비리 226
1. 공능에 의거해서․226 / 2. 종자에 의거해서․229
8. 사분개합문 1
Ⅰ. 4분의 개합 235
Ⅱ. 2분인 능연상과 소연상 238
Ⅲ. 2분의 이증과 경증 242
1. 이증․243 / 2. 교증․253
9. 사분개합문 2
Ⅰ. 3분의 이증과 교증 263
1. 이증․265 / 2. 교증․275
Ⅱ. 4분의 이증과 교증 278
1. 이증․278 / 2. 교증․281
Ⅲ. 1분의 교증 285
맺는 말․290
ㅣ부록 1ㅣ 불교에서 본 칸트 윤리학의 근본개념들
Ⅰ. 들어가기―사마타의 위빠사나를 위하여 311
Ⅱ. 왜 철학에 사마타가 있어야 할까? 313
Ⅲ. 칸트 윤리학의 당위 개념은 불교의 어느 지점에 있을까? 325
Ⅳ. 칸트 윤리학과 불교는 어디서 어떻게 헤어질까? 330
Ⅴ. 맺기―칸트 윤리학을 배우는 불교, 불교를 배우는 칸트 윤리학 345
ㅣ부록 2ㅣ 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의 공명
Ⅰ. 들어가기 347
Ⅱ. 기초개념들 349
Ⅲ. 산란 352
Ⅳ.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아 가는 위빠사나 수행 358
Ⅴ. 문제를 물어 가는 간화선 수행 371
Ⅵ. 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의 열반 성격 382
Ⅶ. 맺기 389
ㅣ참고 문헌ㅣ 393
ㅣ저자 후기ㅣ 401
ㅣ색인ㅣ 407
■ 책 속에서
이 책에서는 선주, 중산 등 일본 고대 불교 논사들의 학설을 다루고 있다. 일본 고대 유식 논사들의 학설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본 유식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유식불교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내 연구방향을 더 잘 보여주는 말일 게다. 호법 유식을 종지로 법상종이 중국에서 발원해서 이 유식이 한국과 일본에 전해졌다. 호법, 현장, 규기로 계승되면서 다소 출입이 있긴 했지만, 동아시아의 유식은 기본적으로 호법 유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유식의 경우, 이를 대표하는 원측이 법상종에서 활동을 하긴 했지만 호법 유식만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또 여러 학설을 열거할 뿐 대체로 판정을 내리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호법 유식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없어서, 한국 유식을 호법 유식으로 단정하기 힘든 점이 있다. (물론 이러한 원측도 호법 유식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사태의 필연성이 있었던 것 같다. 호법 유식으로 판정을 내리는 곳이 아주 드물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법상종에서 활동한 논사들이 있더라도 원측의 주위를 맴돌고 있고 또 비록 호법 유식을 담고 있다고 해도 내려오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는 호법․현장․규기의 법상종의 유식이 거의 내려오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저자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