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소개
가라타니 고진이 한국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우리가 가라타니 고진을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에 소개되는 세계적인 사상가로서 한국에 관심을 갖는 거의 유일한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확실히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이다. 물론 그가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우리가 보기에 문제가 있어보일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는 자주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을 의식한 글도 자주 쓰고 있다.
세계적인 사상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은 가라타니의 이론적 작업은 현재 전 세계를 그 시야에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세계적 사상가들이 그러하듯 설사 전 세계가 그들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론적 핵심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가라타니의 이론적 기초 또한 일본의 역사나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그는 왜 한국에 관심을 갖는 것인가. 그것은 이웃 나라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은 아닌 듯하다. 또 과거사에 대한 일본 좌파지식인의 도덕적 반성과도 무관해 보인다.
가라타니에게 자국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네이션=스테이트이다. 가라타니는 자국의 문화, 심지어는 모국어마저도 그 자체만으로는 이해 불가능한데, 그것은 그것이 무언가를 억압하고 은폐함으로써 성립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네이션이라는 상상적 공동체와 미학이라는 근대예술의 이데올로기를 든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일본과 일본으로 상징되는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억압하고 은폐된 것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와 연결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억압되고 은폐된 것이 바로 한국(조선)이라고 그가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한국이나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어서 그가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놓고 보았을 때, 이는 당연한 이야기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사상가들 중에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가 가라타니가 거의 처음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그의 최신작『네이션과 미학』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널리 읽힐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 모두에게는 그의 관심에 응답할 의무가 있으며, 이런 의무를 빼면 인문학정신에 남는 것이란 외래사상(주로 서구사상)에 대한 짝사랑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짝사랑에서 벗어날 때만이 국내사상과 외래사상이라는 허구적 대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내셔널리즘론의 결정본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맨 앞부분에 <서설> 형태로 실린「서설―네이션과 미학」은『트랜스크리틱』과『세계공화국으로』의 핵심내용을 압축하고 있는 글이다. 따라서 처음 가라타니를 접하는 독자라 할지라도 이 「서설」을 통해 가라타니의 최근 작업의 윤곽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국민국가의 형성과정(그리고 그것의 제국주의적 전개)과 감성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시작한 미학의 등장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글「죽음과 내셔널리즘―칸트와 프로이트」는,『트랜스크리틱』이 칸트와 마르크스의 트랜스크리티컬한 독해의 결과물이었다면, 이 글은 칸트와 프로이트의 트랜스크리티컬한 독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논문이다. 이 글에서 가라타니는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되는 이 두 사상가를 그들의 실제발언을 거스르면서까지 밀어붙여 극한의 공통점을 추출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순히 두 사상가에 대한 래디컬한 독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통해 오늘날 일본사회에 잔존해있는 무의식을 검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최근 일본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평화헌법(헌법 9조)’ 개정문제에 대해 그는 단순히 찬반을 논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역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개정되지 않고 지금껏 유지되어 왔는지를 묻는다. 그럼으로써 지적인 의장으로 자주 이용되는 비관론적 세계관이나 전망에 대해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매우 문제적인 논문이다.
세 번째 글은 일본 근대미학을 대표하는 두 사람에 관한 글이다. 「미술관으로서의 역사」는 최초의 동양주의자이자 사실상 동양미술의 창시자인 오카쿠라 덴신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한 글로서, 오늘날 동양미술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비서구에서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다. 사실 오늘날의 한국미술이나 한국미학도 오카쿠라 덴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동아시아’ 담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다케우치 요시미도 좋지만, 그 전에 오카쿠라 덴신인 셈이다.
네 번째 글, 「미학의 효용」은 식민지조선에 대해 진심으로 애정 어린 관심을 가졌던 공예미술가이자 민예운동가인 야나기 무네요시에 관한 글이다. 아무도 식민지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시절, 대부분의 일본지식인이 조선 지배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 왜 그는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더구나 왜 그는 사대부계층의 세련된 예술품보다 일반 백성들의 투박한 생활용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그는 그냥 마음씨 좋은 식민주의자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으면 당시 식민주의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일본지식인인가? 이 논문 역시 우리로서는 매우 논쟁적인 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 글 「네이션=스테이트와 언어학」은 소쉬르에 대한 총체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글로, 「죽음과 내셔널리즘」 다음으로 문제적인 글이다. 이 글에서 가라타니가 가진 의문은 단 한가지이다. “소쉬르는 왜 침묵했는가?”(주지하다시피, 그의 대표작『일반언어학 강의』는 제자들이 기록한 노트를 편집한 것이다). “왜 그는 책을 쓰는 등 학문적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 물음과 관련된 가라타니의 집요한 분석을 읽고 나면 우리는 기존에 갖고 있던 소쉬르상을 폐기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마지막 글인「문자의 지정학―일본정신분석」은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존에 출간된 쾌저『일본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적 자기평가서이다. 이 글의 핵심은 ‘중국적인 것’ 또는 ‘한국적인 것’과 구별되어 이야기되는 ‘일본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하는 물음과 직결되어 있다. 가라타니는 이와 관련하여 1) 히라가나, 가타가나, 한자를 동시에 사용하고 한자를 두 가지 방식으로(음독/훈독) 읽는 독특한 문자체계와 2) 섬나라인 일본만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를 서로 교차시켜가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 저자 소개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Karatani Kojin)
1941년 생.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현재 컬럼비아대학 객원교수로 있다. 그는 문예비평(문단비평)이라는 협소하고 자족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근현대 철학 사상과 끝없이 투쟁하면서 <자본주의=민족(Nation)=국가(State)>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라는 실천적 통로 찾기 위해 지금도 계속 이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은유로서의 건축>, <트랜스크리틱>, <네이션과 미학>, <역사와 반복>, <언어와 비극>, <근대문학의 종언>, <세계공화국으로> 등 다수가 있다.
조영일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한국문학과 그 적들>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 <근대문학의 종언>, <세계공화국으로>, <역사와 반복> 등이 있다.
■ 차례
일러두기
한국어판 서문
서설―네이션과 미학
제1장 자본=네이션=스테이트
1. 교환의 양식 2. 보로메오의 매듭
제2장 네이션과 미학
1. 도덕감정과 상상력 2. 감성화=미학화
제3장 두 개의 제국
1. 제국과 제국주의 2. 두 개의 ‘제국’
죽음과 내셔널리즘―칸트와 프로이트
서설
제1장 죽음 충동
제2장 숭고와 유머
제3장 세계공화국
제4장 문화에의 불만
미술관으로서의 역사―오카쿠라 덴신과 페놀로사
제1장
제2장
미학의 효용―『오리엔탈리즘』 이후
제1장
제2장
네이션=스테이트와 언어학
제1장 소쉬르
제2장 도키에다 모토키
문자의 지정학―일본정신분석
제1장
제2장
제3장
미 주
게재지 일람
후기
옮긴이 후기
■ 본문에서
칸트가 ‘자연’을 주체로서 취급한 것은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이 주체라는 것은 오히려 역사에는 어떤 주체도 없고, 또 목적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적대성이라는 인간적 자연이 어떻게 국가의 지양=세계공화국을 가져오는 것일까? 거기에 도대체 어떤 구조가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칸트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한 사상가 프로이트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것을 통해 칸트의 영구평화론이나 세계사의 철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프로이트적인 해석으로 칸트를 읽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역으로 칸트의 입장에서 프로이트의 문화론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서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고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는 비평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칸트와 프로이트의 트랜스크리티컬한 독해라고 해도 좋다. -<본문, 75-76쪽>
■ 지은이의 말
근대일본의 담론은 근본적으로 서양과 일본이라는 대비, 또는 좀더 근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대비에 기초하고 있다. 즉 서양이나 중국을 ‘거울’ 삼아 반성하는 모양을 취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자민족중심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거울’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진짜 반성이 아니다.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한국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담론에서 조선은 옛날부터 무시되어 왔다. 중국문화(문자․제도․사상)는 사실상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전래되었다. 도쿠가와(徳川)시대의 지배적 학문인 주자학만 하더라도 조선주자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실이 완전히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
그래서 나는 한국을 끌고 들어오면 이제까지의 반성에 존재하는 맹점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열쇠를 ‘문학’이라는 문제에서 구했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은 의식적인 반성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반성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것을 ‘일본정신분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덧붙여 한국인도 중국과의 관계에서만 자기를 본다는 점에서 일본인과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변경에 있는 일본을 업신여기고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은이, 한국어판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