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차이의 향유를 탐구하는 시”
1. 이 책을 발행하며
이기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겨울이 복도처럼 길어서>가 출간되었다. 4부로 나뉘어 55편의 시가 담겼다.
이기린의 첫 시집 <,에게>(포지션, 2017)에서 시인이 보여준 세계를 평론가 남승원은 “결손의 구조”로 분석했다. “의지는 사라지고 당위만 남아 하루하루 지속되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끝없는 질문들을 끌어들”이는 시라고 했다. 삶의 결핍을 발견하는 예민함이 전체를 상상하는 힘에서 나오고, 고정된 의미를 무너뜨리며 가능성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 <겨울이 복도처럼 길어서>의 해설에서 평론가 김지윤은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으면서 세계의 신비를 보여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떻게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의 기쁨’, 니체가 말한 ‘차이의 향유(la jouissance de la difference)’를 느끼는지를 탐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이 시집의 추천사에서 시인 문태준은 “‘나’라는 존재 너머를 예민하게 상상할 때 최고조에 이른다. …… 이질적인 것을 넘고, ‘나’가 너희와 같은 부류임을 끈질기게 사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기린의 시를 읽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결손’, ‘차이’, ‘이질적인 것’ 등의 시적 개념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상상하면서 이 시집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세계는 무수한 다름(결손, 차이,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체다. 주체의 고정된 인식에 기반해서 만나는 대상들과의 차이가 있으며 또 대상들이 주체의 인식을 흔들어 놓으면서 주체의 분열을 가져오고 주체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변화가 뒤따르며 차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기린의 시에서 빛나는 지점은 바로 차이에 대한 일방적 탐색이 아니라 상호주체성이라는 중층적 관계 속에서의 탐구로 보인다.
대상과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대개는 손쉽게 준거점을 세워놓고 마치 차이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데 비해 이기린의 차이는 검은 이미지라는 배경 속에 차이 그 자체로서 놓이도록 하고 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고, 완전한 해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무수한 해석을 향해 열려 있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2. 지은이 소개
이기린 시인: 1965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진희이다. 2011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하였고, 시집으로 ,에게가 있다. <12+시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다문화교육지원센터 파견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3. 차례
시인의 말 5
제1부
어학원에 다녔어요 10
두 나와 창 12
보라 행성 14
코끼리 사람 16
마당에는 돌멩이 가득 18
한남동 20
양들의 리듬 22
조금 24
나의 단면 26
십자드라이버의 방에서 28
너희의 밤 30
힐링캠프 32
그래도 힘껏 발을 굴러야죠 34
휴무 관찰일지 38
제2부
환타의 트랙 40
투명 산책 41
열, 감기 42
손 흔들지 않고 헤어지는 나라 44
없는 의자 46
밤이라는 벌판에 48
바람으로 눈가를 지우고 50
차창 52
실타래 54
뱀의 시절 56
라플레시아를 찾아서 58
쏘아보다 60
칼날 64
제3부
지네 숲 66
문법 강사 70
검은 개가죽 구두 73
볼가 76
위문 78
기억의 딸 80
유리 같은 사람 82
그리고 남은 것 84
밤에서 밤으로 86
냉장고와 세계 일주 88
금빛 거미줄은 찢겨 90
미션 임파서블 92
푸시업 94
제4부
옥수수 겨울 96
이 다리와 저 가슴 99
가지가 솟아나려고 102
옆집 남자 104
어두워지는 대답 106
대포항으로 오세요 108
지원 센터 110
파라핀의 밤 112
한국말로도 인도네시아말로도 얏미는 얏미 114
류바, 선생님 118
우하하 자카르타 파타고니아 120
밤의 활주로 123
손바닥을 감추게 될 때 124
나보다 오래 울었던 너에게만 126
얼음 호수를 건너는 기린 128
ㅣ해설ㅣ 김지윤 129
4. 본문에서
<너희의 밤>
지금 어디야?
밖이야?
닿을 수 없도록 달아나는, 상상이야?
너희는 흩어진 모래알을 모으고 있었는데
모이고 있었구나.
물결이 밀려와.
있잖아, 있잖아.
불어나는 거품을 삼켰지.
너희는 한 줌 나의 너희를
파도의 입속에 뿌리고
희디흰 성곽을 쌓아
나의 너희가 부장품으로 받은 침묵.
처음부터 없던 나의 너희는
오래오래 말 걸고 싶어.
지금 어디야?
* * * * * *
<류바, 선생님>
겨울이 복도처럼 길어서 류바를 만나게 되었지
멋쟁이 아줌마 류바 총명한 아가씨 류바
고마워, 자작나무를 스치는 속삭임
읽을 줄 모르는 내게 타오르는 문장을 선물해주었지
뛰는 심장이었지
얼음 울음 눈보라
가지 끝에 나는 멈춰 있었네
류바는 겨울 유리를 건너와 내 눈을 닦아주었지
다갈색 머리칼이 환한 금빛으로 보였지
류바가 없었다면
눈꽃의 목소리도 얼어버리게 된다네
다시 만나면 말을 감춰야지
열 번은 머뭇거린 뒤 손바닥을 활짝 펼쳐 흔들래
류바와 류바와 류바 틈에서
선생님은 돌아본다 했지
먼저 알아볼 거야, 사라진 말을 찾아줄 거야
5. 시인의 말
학기를 마치고 수강생들은 여행을 떠나거나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무엇을 계획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노크를 반복했다. 복도 끝에서 류바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어붙은 나에게 그녀가 물었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6. 추천사
이기린 시인의 신작 시집 겨울이 복도처럼 길어서는 새롭고 산뜻한 상상을 보여준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나’라는 존재 너머를 예민하게 상상할 때 최고조에 이른다. 그 상상의 대상은 “나의 너희”(「너희의 밤」)이며, 나의 만물이며, 나의 류바들이다. 시인은 “나뭇잎 사이 언뜻언뜻 장면이 보였지”(「한남동」)라고 말하는데, 이 어룽거리는 대상을 그리워하고, 만나려 하고, 그리하여 ‘나’가 너희의 ‘나’가 되기를 노래할 때 시편들은 “타오르는 문장”(「류바, 선생님」)의 가장 높은 매력을 뿜어낸다. 이질적인 것을 넘고, ‘나’가 너희와 같은 부류임을 끈질기게 사유하게 하는 이 민감한 시편들은 우리에게 아름답고 신선한 감응의 순간을 선물한다. -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