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소개
“태어나서 죄송하다”던 다자이 오사무의 모든 것!
도서출판 b에서 한국어판으로는 처음으로 [다자이 오사무 전집](전 10권)을 출간한다. 지난 1~5권에 이어 제6권 <쓰가루>와 제7권 <판도라의 상자>가 함께 출간되었다.
***
제7권 <판도라의 상자>에는 일본 사회가 완전히 파멸로 접어든 1945년(36세)부터 1946년 사이에 발표한 「판도라의 상자」, 「옛날이야기」 등 장편과 전쟁 중 피난 생활을 소재로 한 중단편 열 편, 전후 일본사회를 비판한 희곡 두 편 등 총 열네 편을 실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연합군의 폭격으로 집이 불타면서 다자이는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전집 제7권의 작품들은 거의 다 고향집인 쓰가루 <사양관>에서 집필한 작품들이다. 「판도라의 상자」와 「옛날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역이다.
전쟁을 목도한 다자이 오사무는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거대이념이나 사상을 증오하며 ‘제비꽃처럼 유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정성을 쏟는다. 폐병에 걸린 소년의 실연담인 「판도라의 상자」와 세상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옛날이야기」는 모두 ‘1945년 8월 15일’ 언저리에 쓰여졌다. 사랑이나 우정, 부끄러움이나 질투 등이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처럼 여겨졌던 전쟁의 시대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던 인간의 소소한 감정들을, 다자이만의 음율과 감각으로 엮어내고 있다. 한편, 스무 살 청년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형식으로 쓰여진 「판도라의 상자」는 옛스럽고 묵직한 ‘하게체’를 피하고, 오늘날 독자들의 감각과 작품 스타일에 맞게 젊고 발랄한 문체로 번역하였다.
다자이 스스로의 작가 연표라 할 수 있는 중편 「15년간」에는 당시 사회에 대한 반감과 예술에 대한 고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이런저런 주의에 편승하는 정치인, 지식인들에게 ‘고리타분하게 어깨에 힘주고 다니지 말라’고 꼬집으며, 자신은 일련의 정치적 사상적 울타리 속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심지어 문단마저도 ‘지식인의 매음굴’이라 비난한다. 예술가의 동력은 오로지 자기 내부의 고뇌와 고독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서, 세상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를 다진다. 평소 일기를 쓰지 않고 마음속의 이야기를 모두 작품으로 발산하는 다자이였기에, 다자이의 일기에 목말라있던 독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한편, 작가 자신의 피난 일기와도 같은 단편 「동틀 녘」, 「사람을 찾습니다」, 「뜰」 등의 작품들은 패전 무렵 일본사회의 붕괴와 몰락을 눈에 보일 듯 세밀하게 그린 작품들로, 다자이와 가족들이 폭격을 피해 고향으로 피난을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으며, 전후 일본 사회의 모순을 강도 높게 비판한 두 편의 희곡 「겨울의 불꽃놀이」, 「봄의 낙엽」은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본성을 그리고 있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잉여인간 다자이’의 이미지와는 달리, 전쟁통 속에서 어떻게든 아이들을 살아내려 하는 ‘아버지 다자이’와 혼란에 빠진 사회의 부조리에 ‘항의하는 다자이’와 같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집이다.
■ 지은이 소개
• 다자이오사무太宰治
1909년 일본 아오모리 현 북쓰가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 1936년 창작집 <만년>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사양>은 전후 사상적 공허함에 빠진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양족’이라는 유행어를 낳을 만큼 화제를 모았다. 1948년 다자이 문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인간 실격>을 완성하고, 그해 서른아홉의 나이에 연인과 함께 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그의 작품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영화화되는 등 시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정수윤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는 <모기소녀>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다자이 오사무 전집 제1권 <만년>, 제4권 <신 햄릿>, 다카하시 도시오의 <호러국가 일본>(공역) 등이 있다.
■ 차 례
판도라의 상자 7
동틀 녘 153
사람을 찾습니다 171
뜰 185
부모라는 두 글자 195
거짓말 203
화폐 219
이를 어쩌나 229
15년간 239
아직 돌아오지 않은 친구에게 267
참새 287
겨울의 불꽃놀이 301
봄의 낙엽 339
옛날이야기 385
| 작품해설 | 한 송이 꽃의 미소로 시대에 반항하다 497
옮긴이 후기 515
다자이 오사무 연표 519
[다자이 오사무 전집] 한국어판 목록 523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펴내며 525
■ 책 속에서
우리는 그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죽음과 맞닿아 살고 있기에, 죽는다는 것에 그리 놀라지 않게 되었을 뿐이야. 부디 이것만큼은 잊지 마. 넌 분명 내 편지를 읽으면서, 일본이 이렇게도 비분과 반성, 우울에 빠져 있는 시기에, 네 주위만 지나치게 한가롭고 밝은 것 아니냐며 철딱서니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럴 만도 해.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야. 아침부터 밤까지 마냥 낄낄거리고 살 수만은 없어. 그건 당연한 거지.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뉴스 시간이면 온갖 다양한 사건들을 듣게 돼. 말없이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있어. 하지만 지금 너에게 그런 뻔한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아. 우리는 결핵환자야. 당장 오늘 밤에라도 피를 토하고 나루사와 씨처럼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하지. 우리들의 웃음은 저 판도라의 상자 한쪽 구석에 굴러다니던 작은 돌멩이에서 흘러나오는 거야.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보다도 한 송이 꽃의 미소가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지금 아스라한 꽃향기에 이끌려 정체도 알 수 없는 커다란 배에 오르게 되었고, 그렇게 하늘에 몸을 내맡긴 채 나아가고 있어. 하늘의 뜻을 품은 배가 어떤 섬에 도달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우리는 이 항해를 믿어야만 해. 죽느냐 사느냐, 그런 것은 더 이상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열쇠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소설 「판도라의 상자」 중에서)
세상에 어설프게 아는 사람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이 녀석들은 십 년 전에 외워둔 정의를 그대로 암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현실을 그 정의 가운데 하나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할머니, 무리하지 마요. 어차피 안 맞는다니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은 영원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간다. 천재의 성실성을 잘못 이해하고 퍼뜨리고 다니는 것은 이 사람들이다. 그리고 오히려 속물들의 위선을 지지하고 있는 것도 이 사람들이다. 일본에는 어설프게 아는 체하는 놈들이 득실득실해서, 그런 사람들로 국토가 꽉 차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좀 더 유약해져라! 훌륭한 것은 네가 아니다! 학문, 그까짓 건 내다버려라!
너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라.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이도저도 안 된다. -(소설 「15년간」 중에서)
■ 옮긴이의 말
전쟁이 끝난 직후 동북지방 지역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결핵소년의 연애담 <판도라의 상자>를 읽다 보면, 누군가 옆에서 가칠가칠한 솔로 피부를 문지르고 있을 것만 같은, 미세하고도 선명한 감각이 느껴진다. 다자이는 작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그러한 감각의 소통이, 사람의 정신을 일깨우고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라 믿었다.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이나 질투, 다툼이나 부끄러움, 혹은 그것들의 뒤섞임.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사람들의 그런 솔직한 감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잔물결처럼 흔들린다. 사소한 개인의 감정은 억제하고 커다란 이념과 사상 아래 단결해야 하는 시대, 이에 동참하지 않거나 변두리에서 맴도는 이들은 불량아들이거나 쓸모없는 놈팡이 취급을 받던 시대, 그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막이 올랐음을, 다자이는 이 작품을 통해 보란 듯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한 송이 꽃의 미소가 더 소중한 이들도 있으며, 그것이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작품해설 중에서)
■ 추천사
좋아하는 작가는 여러 명 있지만 그중에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다자이 오사무를 들 것입니다. 열네 살 때 <만년>을 접한 이래 중고등학교 시절 전집을 즐겨 읽었고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무언가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게 다자이의 소설은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성서와도 같아서, 책을 펼칠 때마다 작고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나곤 합니다. -유미리(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읽는 나이나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재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에 따라 다자이의 문학도 달리 보입니다. 그것은 역시, 그의 작품들이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다자이는 홍역 같은 작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결코 그렇게 한번 읽고 말 작가가 아니라, 평생 꾸준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슈카와 미나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