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소개
도서출판 b에서 자콥 로고진스키(Jacob Rogozinski)의 <자아와 살: 에고-분석 입문>을 펴냈다. Le moi et la chair(2006)를 완역한 것이다. 저자의 단행본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처음이다. 이 책은 자아와 신체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를 해온 자콥 로고진스키의 주저라 할 수 있다. 현대 철학의 거장들의 “자아란 없다”라는 자아살해 선언에 정면으로 맞선다.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앙리, 데리다, 라캉… 현대 사유의 광범위한 영향 속에서 자콥 로고진스키는 자신의 문제의식에 대한 해법을 찾아 나간다. 그 문제의식의 중심에 철학의 오랜 숙제, ‘에고’가 있다. 데카르트 코기토 이래로, 곧 “절대 에고”의 확립 이래로, 에고는 역설적이게도 철학이 풀어야 할 근본 과제로 남는다. 이 역설적 상황 속에서 현대 사유는 데카르트의 문제의식을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데카르트가 나아갔던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데카르트 코기토를 부정하고 에고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자콥 로고진스키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에고는 과연 없애야 할 환영에 지나지 않을까?
현대 사유는 자아를 없애야 할 환영으로 치부하며, 그러한 환영의 근원에 자아 아닌 다른 것, ‘대타자=X’를 상정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나라는 확실성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생기는지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내지 못할뿐더러 자아, 에고를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치명적인 모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힌다는 것이 로고진스키의 주장이다. 그 누구도 어떻게 자아가 그보다 더 근원적인 비-자아에서 나올 수 있는지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자아, 에고를 없애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갈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실패를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듯 에고를 넘어서려는 사유에 회귀하는 에고를 우리는 다시 만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현대 사유가 특히 관심을 갖고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소외”의 문제이다. 로고진스키는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며 이 문제에 나름의 해법을 또한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자율적인 주체”로 상정했던 근대를 지나 현대 사유는 이러한 자율성이 허구이며 인간 자아는 오히려 지배받고 소외된 존재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로고진스키는 그러나 이러한 소외가 근원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를 따르면 해방의 가능성은 모든 소외 이전에 “참된 자아”를 상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자아는 “살아있고 단독적인 자아”이다. 매 순간 자신을 그처럼 경험하는, 그 경험에서 발원하고 그 경험과 하나를 이룰 뿐인 자아가 문제이다. 이 자아를 묻고 해명하는 일이 데카르트를 다시 읽는 것으로 시작해서 “에고-분석”이란 명칭 아래 이 책이 행하는 것이다.
에고를 없애려는 움직임, 그 움직임의 핵심에, 현대 사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현대 사유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두 사상가, 하이데거와 라캉이 있다. 이 책은 먼저 이 두 거장을 소환해 비판에 회부한다. “에고 제거”, “에고 파괴”라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그들의 주장과 분석이 정당한지 이 책은 묻는다. 그들의 주장이 오히려 데카르트 사유를, 아니 그 이전에 먼저 ‘자아 그 자체’를 깊이 오해한 데서 생긴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의문, 나아가 비판은 하이데거와 라캉을 넘어, 이 책이 분석 대상으로 주요하게 삼지 않았을지라도, 사르트르, 레비나스, 메를로 퐁티, 들뢰즈, 데리다와 같은 현대 사유의 다른 거장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에고를 해명하는 일이 ‘분석’이라는 방법을 통해 행해질까? 어째서 에고는 분석의 대상이 될까? 이 책에서 로고진스키가 싸우는 또 하나의 지배적인 편견은 바로 에고를 “하나의 에고”, “언제나 똑같은 에고”로 보는 사유이다. 그는 자아를 “다수의 통일성”처럼, “근원적으로 나뉘었지만 통합된 자아”처럼 보아야 하며 이 통일성이 “내게 단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발생의 마지막 단계”에, “언제나 새로 다시 쟁취”해야 할 것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통일성”의 문제에 직면한, “분산된 수많은 에고”라는 생각으로부터 에고를 해명하는 일은 “에고-분석”이라는 명칭을 지니게 되며, 결국 문제는 로고진스키가 선언하듯 “주체화”의 문제, “재-창조”의 문제가 된다. 에고-분석은 자아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내 안에 있는 타자”, “최초의 낯선 것”, 저자가 “레스탕(restant)”이라고 부를 것으로 우리를 이끌게 될 것이다.
■ 지은이 소개
자콥 로고진스키(Jacob Rogozinski)
국제철학학교(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프로그램 최고책임자를 역임했으며, 현재 스트라스부르그 대학 철학 학부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관심은 자아와 신체 문제에 집중했으며 이는 그의 주저가 된 <자아와 살>(2006)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현상학에서 나온 현대적 사유, 특히 데리다의 사유와 비판적 대결을 벌였으며, 그의 <데리다의 지하납골당(Cryptes de Derrida)>(2014)은 그 현대적 사유에 바친 책이다. 최근 연구에서 그는 문학(<삶을 치유하다(Guérir la vie)>(2011)는 시인 앙토냉 아르토에 바친 책이다)과 역사와 같은 상이한 영역에 그의 가정을 적용해봄으로써 그 가정을 확인하고 심화하려 노력한다. 에고 영역에서 구성되는 근원적 현상을 기술한 뒤에 어떻게 그 근원적 현상이 상호주관성의 차원, 세계와 역사의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그는 축출과 박해의 역사적 현상을 분석하고자 시도했다. 이는 그의 최근 저서 <그들은 나를 이유 없이 증오했다(Ils m’ont haï sans raison)>(2015)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은정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셸 앙리의 <야만>(2013)을 옮겼으며 공저로는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2014) 등이 있다. 강의하고, 번역하고, 연구하는 삶을 올곧게 살아내고자 노력하며, 자아, 신체, 삶을 주제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기 9
첫 번째 부분 | 에고살해에 맞서서
“EGO SUM MORIBUNDUS(에고는 죽었다)” 또는 하이데거의 부름 29
“나는 타자다” 32
“나는 죽었다(나는 죽어가고 있다)” 43
“개인은 아무 가치가 없다”[하이데거의 나치즘을 다루며] 59
존재의 십자가 70
“나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는 죽은 사람이다” 또는 라캉의 주체 85
mouroir 단계 88
“누가 결국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106
“Wo Es war, soll Ich werden(그것이 있었던 곳에 나는 생겨나야 한다)”[프로이트로 돌아감?] 120
두 번째 부분 | 데카르트로 돌아감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나는 존재한다” 138
인간도 아닌, 주체도 아닌 15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삶이다” 160
내가 사라지는 순간 172
“Larvatus pro Deo(나는 신 앞에서 가면을 쓰고 나아간다)”[데카르트의 유산] 181
세 번째 부분 | 에고-분석 개론
현상학의 모호함 207
내재성의 영역 228
살의 종합: 키아슴 246
어떻게 만지는 자신을 만질까: 키아슴의 (불)가능성을 다루며 264
만질 수 없는 것의 영향 아래: 레스탕 274
이것은 내 몸이다(아니다): 체화의 레스탕 297
타인을 너머서 334
키아슴의 위기 376
증오에서 사랑으로 388
아르케-임종에서 부활로 417
해방을 향해[내자태] 447
감사의 말 477
참고 문헌 479
인명 찾아보기 491
개념 찾아보기 497
옮긴이 후기 505
■ 본문 속에서
하이데거는 sum에 집중함으로써, 에고를 자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고 그 존재로부터 생각하고자 함으로써 에고의 의미를 전적으로 오해했다. 그는 자아의 내재적 핵심이 존재(Être)의 영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자아는 어떤 방식에서도 “존재하지도”, “실존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무차별을 이유로, 존재 물음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데카르트를 비난했지만, 그러한 무차별, 무관심은 결함이 아니라 전례 없는 대범함, 존재에 낯선 에고의 수수께끼를 돌파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후설은 내재적 자아가 세계‘와 존재’를 벗어난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것을 작용 밖에 둠으로써 데카르트에 다가갔다. 그는 자아가 존재를 “앞서며”, “근원적인 선-존재[Vorsein]”, “근원적인 삶”, 그렇지만 “매우 구체적인 자아”가 문제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너무도 새로운 생각이어서 이해받지 못했다. 후설의 후계자는 대부분 반대로 하이데거의 길을 좇고 존재의 지평에서 자아나 주체를 붙잡으려 했다. -(82쪽~83쪽)
죽기 몇 주 전에 메를로 퐁티는 알쏭달쏭한 필기를 남겼다. “프로이트 철학은 신체 철학이 아닌 살―그것(Es), 무의식―의 철학이다. 그리고 [상관적] 자아는 살이라는 존재(Être)에 하나로 ‘대거’ 들러붙은 데서 ‘분화하는 것’으로 […] 살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메를로 퐁티의 지적을 따라 프로이트 이론을 “살로부터” 이해하되 “존재의 보편적 요소”로 더는 규정되지 않는 살, ‘언제나 내 것’인 살로부터 이해하며 프로이트 이론을 재정초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관점에, 곧 자아와 살의 근원적 결합이라는 관점에 자리 잡을 때, 프로이트 저서를 수놓는 천재적 직관은 새로 빛을 발한다. 꿈이나 환상이나 욕망의 “절대적으로 이기적인” 성격, 리비도의 “근원적 나르시시즘”, 신체운동과 “운동 방출”의 리듬이 갖는 중요성, 신체 표면의 촉각 지각에서 나온 “자아-신체”, 초자아를 이루고자 자아 표면에 새겨지는 청각 흔적이나 목소리의 파편, 이 모든 것이 에고-분석의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129~130쪽)
사유의 차원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에게 모든 걸 빚진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자아를 격하하거나 지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경계하도록 한다. 우리가 오늘날 힘의 의지, 언어, 무의식, 존재라고 명명하는 위대한 기만자, 나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나”는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하는 위대한 기만자의 셀 수 없는 속임수를 경계하도록 한다. 우리의 프랑스 기병은 위대한 기만자의 술책에 굴복하기 전에 그 술책을 좌절시켰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데카르트 그 자신에 맞서서, 그가 “ego sum”의 특권을 부인하기에 이르도록 한 것에 맞서서,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에고살해에 맞서 자아를 옹호하고자, 에고를 다루는 근본적인 생각을 재구성하고자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인 이 자아가 누구인지를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쪽)
레스탕이 ‘참으로’ 낯선 것이 아니라는 데 적어도 논란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레스탕이 내 삶에 불법으로 침입할 때, 여전히 내 살이 내게 주어지고, 나는 나 자신을 대상으로, 내 에고의 알려지지 않은 한 부분을 대상으로 불안해한다. 이 유령한테 쉼 없이 쫓기고, 이 유령을 대상으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아는 자기로부터 자기를 촉발할 뿐이다. 살의 종합이 행해지기에 앞서, 내 살은 먼저 촉각 속에서 세계의 다른 사물과 비슷한 외재적 사물처럼 그 자체에 주어진다. 그러한 극은 같은 살의 부분처럼 알려지지 않았다. 키아슴은 자아-살의 모든 극 안에서 자아-살을 자체에 드러냄으로써 이 근원적 은폐를 없애기에 이른다. 키아슴은 진리를 만든다. 키아슴은 알레테이아의 주요한 한 양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드러남은 절대 완전하지 않으며 살은 전적으로 노출되기를 거부한다. 모든 극에서 비-살의 일부처럼 다른 극에 고집스럽게 주어지는 내 살의 일부가 레스탕이다. 이는 레스탕이 어떤 고유한 확고함도 지니지 않는다고, 가상이나 불가피한 착각, 자아-살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반-진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전적으로 외재적인 요소, “불청객”, 인위적으로 옮겨 심은 “보철”처럼 그 현상을 헤아림으로써 그것을 잘못 생각한다. 물론, 레스탕은 그처럼 제시된다. 그것은 바깥으로부터 나를 괴롭히는 타자의 특징을 띤다. 하지만 이는 레스탕이 그 본래적인 정체성을 숨기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내 살의 살이다. -(294쪽~295쪽)
■ 지은이의 말
철학에 입문하는 많은 이를 사로잡는 물음이 아마도 ‘나는 누구일까?’라는 매우 막연하지만 본질적인 물음일 것이다. 이 물음 때문에 아마도 많은 이가 철학에 돌진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지난한 여정에 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중간에 물음을 철회하거나 변형할 수는 있다. 또는 아주 반대의 길로 나아가, 현대 많은 사상가들이 했던 것처럼,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아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선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 애초에, 그리고 여전히 자아의 물음이 아니라면 이런 식의 선언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로고진스키는 자아의 물음을 그의 철학적 물음으로 오롯이 삼는다. 그 물음에 해답을 주고자 노력한다. 그는 주저 없이 오늘날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살아 있고 단독적인 자아의 경험”으로 돌아가 ‘나’라는 수수께끼에 몰두해야 한다고. 현대 사유의 거장들이 에고의 죽음을 선언한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에고를 다시 꺼내든다. 그리고 다시 철저히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에고, 자아에 놓이는 물음이야말로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확신에서 그의 책은 출발한다. -<옮긴이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