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발행하며
[정오의 그림자: 니체와 라캉]은 도서출판 b에서 기획한 <슬로베니아학파 총서>의 여섯 번째 책이다. 슬로베니아학파는 슬라보예 지젝, 믈라덴 돌라르, 레나타 살레츨, 미란 보조비치,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알렌카 주판치치 등이 주축을 이루는데 그들의 특장은 뭐니뭐니해도 독특한 해석에 있다. 그것이 텍스트이건, 현상이건 그들의 사유가 끼어들면 종래의 고착된 의미는 전혀 다른 차원과 양상으로 재해석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은 데카르트적 근대에서 포스트모던한 현대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룬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이미 <슬로베니아학파 총서> 시리즈로 소개된 [실재와 윤리: 칸트와 라캉]을 선보인 바 있다. [실재의 윤리: 칸트와 라캉]에서 주판치치는 칸트에 대한 방대한 해석 끝에 라캉이 욕망의 윤리라고 부르는 것을 칸트로부터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욕망의 윤리란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양보하지 말라는 준칙으로 정식화되는 윤리이다. 욕망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욕망을 만족시키는 궁극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욕망은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의 끊임없는 환유 과정에 종속된다. 욕망의 윤리란 바로 이러한 욕망의 논리를 그 극한으로 가져간 것이고,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집하는, 다시 말해서 순수한 욕망의 논리를 고집하는 논리이다. 하지만 주판치치는 라캉의 입장이 어떻게 욕망의 개념에서 궁극적으로 충동과 향유가 작동하는 실재라는 차원으로 이동하는가에 주목하면서 욕망의 윤리를 넘어선 새로운 윤리를 정초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는 이 책 [정오의 그림자: 니체와 라캉]은 알렌카 주판치치가 두 번째로 내놓은 야심작이다. 이번에 그녀가 다루는 것은 다름아닌 니체다. 그녀는 이 책에서 니체를 고스란히 본래의 니체로 되살려 놓는다. 칸트를 다루는 그녀의 첫 책인 [실재의 윤리]를 읽은 독자라면, 과연 그녀가 어떻게 니체를 다룰 것인가를 미리부터 기대할 것이다. 이 책은 물론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더 먼 곳까지 나아간다.
니체만큼 다양하게 평가받는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 하면 떠오르는 어떤 잘 정돈된 이미지들이 있다. 또한 칸트, 혹은 하이데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다양성의 폭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게 니체의 이미지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니체는 니체를 읽는 독자들이나 해석가의 마음속에 다양한 이미지들, 혹은 상반된 이미지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 모순되는 이미지들을 산출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해석을 만만치 않은 작업으로서 후대를 위해 남겨두었다. 그래서 니체는 스스로를 “뉘앙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가 니체를 그의 시대이건 아니 그 어떤 시대이건 주류에서 비껴 서있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니체가 유행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 유행불가능성이 니체의 결정적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니체의 다양한 면모를 한꺼번에 모두 다룰 수 있을까? 니체를 자신의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도 읽고 저렇게도 읽는 대신에, 자신의 관점에 따라서 니체 철학의 핵심은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말하는 대신에, 니체의 뉘앙스 그 자체를 다룰 수 있을까? 철학사에서의 니체라는 “사건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 가능할까? 그동안의 니체에 관한 저술들은 그것이 손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들뢰즈의 니체”라는 정도가 그것이다. 들뢰즈는 또 한 명의 니체가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주판치치의 니체가 탄생할 것인가?
주판치치의 이 저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과 매혹은 그녀가 니체라는 사건 그 자체를 다루는 이 불가능한 과제에서 성공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녀는 상반되거나 모순되어 보이는 니체의 모든 면모들을 기꺼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 놀랍고도 작은 기적 같은 저술에서 주판치치는 그런 것쯤은, 즉 니체의 전부를 다루는 것쯤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양 수월하게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사건 니체를 다루는 그녀의 그 수월함과 솜씨를 보고 잠시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비유를 하자면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예컨대 양궁에서라면 과녁의 한 가운데로 정확하게 날아가는 책이다. 오랫동안 니체를 읽어왔던 독자들은, 혹은 니체를 읽지는 않았어도 사랑은 했던 독자들은, 혹은 왠지도 모르면서 니체를 증오해왔던 독자들은, 주판치치의 [정오의 그림자]에서 최후에 근접한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 저자 소개
알렌카 주판치치(Alenka zupančič)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는 슬로베니아 학술원 철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자신과 믈라덴 돌라르와 주판치치를 <트로이카 당>이라고 부르듯이 그녀는 슬로베니아학파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는 국내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편집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에 실린 「죽기에 완벽한 장소: 히치콕 영화들에서의 극장」로 처음 소개된 바 있다. 그리고 저서로는 칸트를 다룬 [실재의 윤리: 칸트와 라캉]과 니체를 다룬 [정오의 그림자: 니체와 라캉] 등이 있다.
조창호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옮긴 책으로는 슬라보예 지젝 외 [성관계는 없다](공역)가 있다.
■ 차례
서문 ― 사건 “니체” | 7
1부 메타심리학자 니체
“신은 죽었다” | 55
금욕주의적 이상 | 73
허무주의…… | 95
…… “승화의 위기”로서? | 109
2부 정오
진리에서의 문제들 | 137
병합된 허무로부터…… | 187
…… 이중 긍정을 거쳐…… | 197
…… 최소 차이로서의 허무로 | 223
첨부: 희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 245
■ 본문에서
정오의 이 형상 또는 테마에서 무엇이 그토록 비상한가? 니체는 이 테마를 새로운 시초의 관념, 그 뒤에 어떤 것도 이전과 같지 않을 사건의 관념을 위한 형상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하고 사용한다. 이 관념은 우리에게 흔히 그리고 무심코 아침의 은유나 테마를 연상하게 하는 무엇이 아닌가? 예를 들어, 허무주의의 밤(그 유명한 “영혼의 어두운 밤”) 뒤에, 새날이 밝아오고 상쾌한 시작을 알릴 것이다. 하지만 이 관념에 관해 니체는 다른 은유, 한낮, “위대한 한낮”의 은유를 고집한다. 이 새로움을 향한 길을 추적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실제로 아침에 끝난다. 그러나 여기서 아침은 다만 한낮을 향한 전주곡으로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아침이다, 나의 아침이 밝고 있다. 지금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가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말이다.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마지막 동반자인 “고귀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무를 향한 열정에 빠져 죽는 편이 낫겠다고 제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죽음 또는 사라짐은 전혀 “새로운 시초”의 조건이 아니다. 끝 바로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그의 동굴에 남겨둔 채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이리하여, 사건의 시간은 태어남의 시간도 죽음의 시간도 아닌, 말하자면, “가운데”의 시간이다. 왜 니체는 이것을 끈질기게 주장하는가?(44~45쪽)
니체에 따르면, “노예들”과 그들의 “군림”은 전혀 지배의 지형학을 전복하거나 폐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지배는 그 값어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또는 최종적으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심지어 신조차 신이라고 불릴 권리를 벌어야 한다. 신은 그의 일을 수행하는 데 점점 더 무능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사람들은 그가 그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의심할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니체에게 바로 이것이 그 순수한 형태에서의 “노예의 도덕성”이다: 우리는 신/주인을 원한다, 그러나 능력있는 자로 원한다! 우리는 주인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의존할 주인, 우리가 승인할 수 있고 결국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 있는 주인을. 다른 말로, 우리는 주인 없는 지배를 원한다.(71쪽)
■ 추천사
“아직은 우리가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분은 들어왔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이 놀라운 책에서 그 정반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주판치치는 니체의 텍스트에서 강력한 새로운 개념, 즉 정오라는 개념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니체는 신의 죽음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상대주의 챔피언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결정적으로 논박한다. 회의주의적 상대주의가 현대 세계를 위해 신을 소생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녀는 진정한 사유를 위한 니체의 공헌을 완전히 재평가하고 있다. 이 책이 성취한 철학적 업적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운 콥젝
알렌카 주판치치는 니체에 대한 놀랍도록 새로운 독서를 제공한다. 니체 철학의 포스트모던적 차원에 반대하면서 주판치치는 니체의 스타일과 사유의 충격을 부활시킨다. 그녀는 라캉과 바디우를 따라서 니체를 혁명적인 ‘사건의 철학자’로서 읽고 있다. -크리스토프 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