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 람풍네의 이웃에 사는
농사짓는 시인의 눈길
1. 이 책을 발행하며
최성수 시인의 제6시집 <람풍>이 출간되었다. ‘람풍’은 베트남에서 강원도로 시집와서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교사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얼치기 농사꾼’이 된 최성수 시인과 이웃이자 친구로 지낸다고 한다. 그 람풍이 모델이 된 시편이 상당수가 들어 있는 이번 시집에는 67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심고 이웃과 밥을 나눠 먹던, 또 찐빵으로 유명한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의 ‘보리소골’이다. 베트남댁 ‘람풍’은 보리소골에서 시인의 이웃이자 친구로 살고 있다. 시인은 그 람풍이라는 인간과 그의 사랑과, 노동과, 꿈을 이번 시집에서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롱지중학교 2학년 3반 교실 문 앞에서 / 람풍이 고개를 돌린다 / 졸업조차 하지 못한 그 학교, / 선생님과 부둥켜안고 울다 / 책 보따리 챙겨 나오던 / 그날이 떠올라서였을까?”(「롱지중학교」) 람풍은 현재 서른아홉 살의 베트남댁인데, 어린 시절의 가난하고 식구는 많은 집에서 태어나 가족을 위해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일을 해오다가 스무 살에 안흥에서 농사를 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시집을 왔다. 거기서,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꿔보고 싶어 했던 교사 출신인 최성수 시인과 만나 이웃이 되었고…….
시인은 제자뻘쯤 되는 나이인 람풍의 삶을 촘촘하고 다감하게 바라보며 시로 남겼다. “국도 확장에 편입돼 없어질 배추밭에서 / 쌈배추를 따고 일어서던 람풍이 / 배춧잎 수북한 밭을 무연히 바라보다 / 해 뜰 무렵 이슬 같은 말을 건넨다 / “그동안 고생 많았어, 배추밭아. / 이젠 편히 쉬어. 땀비엣””(「람풍의 샤머니즘」). 시인은 람풍의 끈질긴 생명력이나 끝없는 낙천성에 대하여 “음~ 람풍은 메콩강 같은 사람이야. 굽이굽이 흘러가는데 흐름을 멈추는 법이 없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따뜻하고 자상한 눈길을 가진 시인은, 먼 곳에서 낯설고 물설은 곳으로 와서 여러 이질적인 차이를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람풍에게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는데…….
그 친분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최근 시인은 지병으로 인해 갈수록 시력이 희미해져서 운전조차도 힘든데, 가끔 시인을 대신해 람풍이 운전을 해주기도 한단다.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이 아름다운 관계를 시인은 “이 시들을 쓰는 동안 나의 뮤즈”였다는 말로 고백하며 이 시집을 람풍에게 헌정하고 있다.
2. 지은이 소개
최성수 시인: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한 뒤, 오래도록 성북동에서 살았다. 약 30여 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며 배웠다. 퇴직 후 다시 고향 안흥으로 돌아와 얼치기 농사를 지으며 나무와 꽃과 바람을 만나는 행복에 빠져있다.
1987년 시 무크지 민중시 3집을 통해 작품 발표를 시작했다. 시집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 년 전 같은 하루, 꽃, 꽃잎, 물골, 그 집을 냈다.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무지개 너머 1,230마일과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를 펴내기도 했다. 청소년을 위한 책 고전 산문 다독다독, 가지 많은 나무가 큰 그늘을 만든다, 강의실 밖에서 만나는 문학 이야기 등 여러 책을 내기도 했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7
제1부
눈동자 15
람풍네 고추 심는 날 17
롱지중학교 18
천렵 하루 20
엄마의 바다 22
안방 마을 유치원 23
타작 밥도 없이 24
우리 동네 드러머 26
비닐하우스 콘서트 28
민정이네 저녁노을 30
앵두꽃 필 무렵 32
틈새 34
두 여인 36
대구 37
박새 날다 38
두부 쑤는 날 40
달빛슈퍼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 42
나가사키 44
람풍의 샤머니즘 46
입동에 감자를 고르다 48
들깨를 털면서 50
농라 하나 52
논바닥 운동장 53
제2부
물레나물꽃 57
나리꽃 58
잠자리와 상사화와 칠월 어떤 갠 날 59
순댓국집 수선화 60
숲속은 봄날 62
금계국 63
유월 64
달개비 65
귀룽나무는 봄 66
먼 그대 67
간지럼 68
삼월, 눈 69
봄 70
소녀 71
천장터에서 72
박꽃 필 무렵 74
둥지 75
시월 76
부부 77
세상 끝의 그 역, 치와타 78
구월 80
백로에 81
11월 82
산 너머 겨울 83
까마귀와 할머니 84
제3부
낡은 집 87
청국장 88
이름 90
골목을 걷는 법 92
묵호 94
꽃피는 그대 96
홀로 있는 밤 97
나뭇잎 잠 98
감나무가 있는 한옥 지붕 위의 고양이 99
낙엽 100
사슴벌레 101
잠자리 비행기 102
햇빛의 손 103
땅거미 질 무렵 104
늦은 봄꽃을 보며 105
진달래 106
헌책을 버리며 108
새벽 109
또, 봄날은 간다 110
ㅣ발문ㅣ 김영춘 111
4. 본문에서
<롱지중학교>
롱지중학교 2학년 3반 교실 문 앞에서
람풍이 고개를 돌린다
졸업조차 하지 못한 그 학교,
선생님과 부둥켜안고 울다
책 보따리 챙겨 나오던
그날이 떠올라서였을까?
스무 살, 물설고 낯선 ‘한꿔’로 시집온
람풍의 기억 속 그 학교는
영원히 그리운 나라
십육 년 만에 찾아가서도 여전히
아련하게 살아오는 그날
교실 명패를 바라보는 람풍의 눈은 젖어 있다
아이들 재잘거리며 매점으로 달려가는
롱지중학교 왁자한 복도 어디쯤
람풍은 지금도 서 있는 것일까?
살아가는 일이란 늘 자욱한 먼지,
송까이런 위를 떠다니는 부레옥잠 같은 것
휘청, 계단을 내려오던 그녀의 시선 끝
야자나무 잎을 흔들며
그날이 스쳐 흐른다
* * * * * *
<두 여인>
투하, 저것 좀 봐
고추 지지대 위 손톱만 한 흙도 땅이라고
비집고 뿌리내린
풀이 불쌍하지 않아?
너나 나 닮지 않았어?
물설고 낯설은
한국하고도 강원도 이 산골이
어쩌면 우리에겐 저 고추 지지대 끝
흙 한 줌 같은 곳 아닐까?
람풍이 고춧대 끝에 매달린
풀을 쓰다듬는다
고추 따다 흙 묻은 손 털지도 않은 채
투하도 아련한 눈길을 얹는다
두 베트남댁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바람 한 점 없는
첩첩 산골 하늘만 눈부시다
* * * * * *
<람풍의 샤머니즘>
깨를 털고 빈 들을 바라보던 람풍이
주섬주섬 깔개를 걷고 돌아서며
저녁노을같이 속삭인다
“논아, 깨야, 고마워.
깔개야 너도 하루 동안 수고 많았어.
내년에도 부탁할게.”
국도 확장에 편입돼 없어질 배추밭에서
쌈배추를 따고 일어서던 람풍이
배춧잎 수북한 밭을 무연히 바라보다
해 뜰 무렵 이슬 같은 말을 건넨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배추밭아.
이젠 편히 쉬어. 땀비엣”
그녀의 신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밥 주는 소도, 여무는 고추도, 옥수수꽃을 흐르는 바람도
다 그녀의 신이다
신은 친구다, 그 자신이다
볏짚을 실은 트럭 창 너머로 오늘은
대설의 신이 손을 내밀었다
람풍의 하루가 또 신성으로
가득 차오른다
5. 시인의 말
창궐하는 전염병과
생사의 기로에서 아득한 시간이 지나갔다.
떠돌다 머물면 몸은 병들고
삶은 더 아득해지는 것일까?
세상에는 온통 내려앉는 것 천지다
꽃잎 지는 봄부터 눈 내리는 겨울까지
결국은 흘러갈 것이고
마침내는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자리에서 그저 나무처럼 서 있을 뿐이다.
6. 추천사
이 시집의 중심인물인 람풍은 스무 살에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댁이다. 나는 람풍이 16년 만에 고향인 메콩 하류 롱지에 갈 때 동행했던 인연이 있다.
람풍은 베트남과 한국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과 연관된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람풍은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를 건너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람풍은 우리에게 부끄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갖게 해준다. 과거를 넘어 나라의 구별이 없는 열린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길을 우리는 람풍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웃으면 두드러져 보이는 귀여운 송곳니의 람풍은 오늘도 맛난 베트남 음식으로 최성수 선생 부부를 기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음식 사진을 볼 때마다 같이 먹고 싶다. 람풍의 나라 베트남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준 사람, 최성수 시인의 시들은 이 시집 속에서 람풍의 꿈이 되어 깃발처럼 푸르게, 희망으로 휘날린다. -조영옥(시인)
시인은 돌아왔다. 앞뜰엔 팥배나무 이파리가 눈 시리게 뒤척이고, 뒤란엔 송진 냄새 가득한 고향집으로. 아버지와 같이 심었다는 낙엽송이 긴 산그늘을 이루는 산골 집으로. ‘아픈 몸’으로 돌아왔으나 누군가의 든든한 곁이 되었다. 시인은 산밭에 손가락을 그어 걸리는 것들을 쓴다. 멀리 베트남에서 스무 살에 시집온 람풍과 어느새 소녀가 된 민정이의 명랑함을 쓴다. 멀리 시집보낸 아버지의 눈빛으로 쓴다. ‘논아, 깨야, 고마워. 배추밭아, 고마워’ 모든 자연 사물에게 신성이 있으리라 믿는, 아니 신성 자체일 람풍의 읊조림은 문명의 홀씨가 되어야 마땅할 터. 단정한 시편들은 이 나라 곳곳에 사는 어엿한 한국인일 람풍들에게 건네는 무명 손수건이다. 시인은 이렇게 걸리는 게 많아서 앓는 사람이었다. -문동만(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