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을 발행하며
나석중 시인의 시선집 <노루귀>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그동안 모두 8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는데 이들 시집에서 시인의 마음 속 깊이 공명하는 시를 가려 이번 시선집에 묶었다. 시집에는 88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시집의 권말에 장인수 시인의 해설을 곁들였다.
나석중 시인의 시는 초기부터 꽃과 물, 돌에 심취한 시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무작정 걸망을 메고, 괭이를 들고 불원천리 물가를 찾아 전국 팔도를 돌며 꽃을 만나고 물을 만나고 돌을 만난다. 발길마다 꽃의 이야기를 듣고, 물의 노래를 듣고, 돌의 침묵을 들었다. 하여 나석중 시인은 스스로 “나의 시는 태반이 작자 미상의 자연을 베”낀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다.
작은 한 송이 꽃에서 “너무 아득한 산속은 말고 / 너무 비탈진 장소도 말고 // 실낱같이라도 물소리 넘어오는 곳 / 간간이 인기척도 들려오는 곳 / 메마른 설움도 푹 적시기 좋은 곳 // 귀 하나는 저승에다 대고 / 귀 하나는 이승에다 대고”(「노루귀」 전문)라며 삶과 죽음의 교감을 동시화하는가 하면, 수석을 일컬어 “돌 한 점 만남은 필연이다 / 여기까지 이끼 낄 새 없이 굴러온 돌이 빛난다 / 이 돌 한 점이 가슴 속에 깊이 박힌 돌 하나 파낸다 / 수석은 하나님이 퇴고를 마친 시(詩)다”(「수석론」 부분)라고 찬미를 하기도 한다. 또 꽃을 피워올리고 돌을 탁마하는 부드러운 힘을 갖은 물을 보며 “돌끼리 부딪쳐 깨지고 / 솟아난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 통증조차 느낄 수 없도록 / 가만가만 핥아 주었을 것이다 / 오히려 돌의 상처를 씻어내던 혀가 / 갈기갈기 해지고 / 닳고 닳았을 것이다, 아팠을 것이다”(「물의 혀」, 부분)라고 노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들을 읽다 보면 시인은 마치 시적 대상 속에서 구도자적 수행을 읽어내고 어떤 깨달음을 향해 육도만행을 하는 수도자를 닮아 있다.
권말의 해설에서 장인수 시인은 나석중 시인을 일컬어 “들풀, 들꽃, 물, 돌에 대한 사랑과 경건함과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이 남녀 관계의 인간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뜨겁다. 그래서 나석중 시인은 영원한 야생 시인이다. 생태주의적 시인이며, 자연 시인이며, 인본주의적인 시인이며, 구도 시인이며, 로맨티스트 시인”이라고 말한다.
2. 지은이 소개
나석중 시인: 193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저녁이 슬그머니>, <목마른 돌>, <외로움에게 미안하다>, <풀꽃독경>, <물의 혀>, <촉감>, <나는 그대를 쓰네>, <숨소리> 등과 미니시집(전자) <추자도 연가>, <모자는 죄가 없다>, 디카시집(전자) <라떼>, <그리움의 거리> 등이 있다.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가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된 바가 있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5
제1부 꽃을 경을 읽었다
작은 꽃 13
노루귀 14
시작 15
우화 16
절정 17
속리에서 속리를 벗다 18
물레나물 19
풀꽃 독경 20
나이테를 위한 변명 22
애기똥풀 24
굳세어라 금순아 25
겨우살이 26
자작나무 인생 27
밤꽃 28
문득 29
그가 먼저 걸어간 것 같다 30
죽순밭에서 31
청산도 32
촉감 33
동백꽃 34
서녘에 잠기는 저 한 송이 붉은 꽃이 35
제2부 아우를 소나무라 불렀다
지갑 39
아프지 마라 40
주택연금 41
창 42
입정 43
가정 44
느티나무 45
삼부자 46
김제 47
물의 연혁 48
만경강 50
혼자 먹는 밥 51
소나무를 아우라 불렀다 52
푸 궉 53
에덴의 서쪽 2 54
류머티즘 56
노을 57
어머니의 눈물 58
물소리 59
독작 60
독 61
물의 동안거 62
제3부 저녁이 슬그머니
솟대 65
저녁이 슬그머니 66
묵은 사과 67
새의 눈물 68
막도장만큼이라도 69
빈집 70
성냥 71
상강 72
소양강은 흐르고 73
연애하고 싶다 74
사랑의 수의 75
나는 그대를 쓰네 76
강 77
낮달 78
수평선 79
돼지머리가 웃는다 80
박제된 골목길 81
물의 계단 82
일쇄 83
추자도 연가 84
건널목 86
11월 87
그믐밤 88
제4부 구름 위를 걸었다
숨소리 91
불발탄 92
화사도 93
천 년 94
오석 95
첫 세수를 하고 96
돌 98
물의 혀 99
오도리행 100
얼큰한 돌 102
돌이나 되었으면 103
농아 104
수석론 105
부부 106
돌멩이를 던져라 107
목마른 돌 108
집 109
그리움 110
폐광 111
채석강 112
바람의 기원 113
밀양 114
ㅣ해설ㅣ 장인수 115
4. 본문에서
<풀꽃 독경>
어제는 은꿩의다리를 찾아 읽고
오늘은 금꿩의다리를 찾아 읽네
야생의 풀꽃 경(經)에 빠지다 보면
더러 한 끼의 밥때를 놓치는 마당에
외로움이란 감정의 사치에 불과한 것
돌이든 풀꽃이든 詩든
거기에 마음 앗기다 보면
백수 같은 외로움 맞아 놀아날 새 없네
강아지풀을 보면 나도 강아지풀이나 되어서
무엇이 좋다고 저렇게 꼬리를 흔들흔들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은데
강아지풀 너도 나를 보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싶은 거냐
장마 그치고 바야흐로 가을로 들어섰지만
이제야말로 연애하기 좋은 시절이듯
매미들 시퍼런 소리 갈아대며 극성인데
숲속 오솔길 거침없이 솟아오른
깨벗은 무릇 한 쌍이
나를 조금 부끄럽게 하네
* * * * * *
<소나무를 아우라 불렀다>
자네는 나무 아래 잠들고
이따금 늦잠 비비며 깨고 나선
우듬지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남쪽 환히 트인 양지를 바라보겠지
전생에서 사랑했던 아내와 외아들
토끼 같은 두 딸을 생각하겠지
그리고 오랜 생각 끝에 끌려 나온 이 형도
아련한 기억 거슬러
젓가락으로 막걸릿잔을 저으며 우애를 하던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웃음을 짓겠지
자네는 나무 아래 묻혔어도
소나무의 늘 푸름으로 살고 있기에
이 형이 막걸리 한잔을 따라 올리고
자네의 붉은 몸을 울먹이며 만지네
하늘숲공원의 자네는 7-77-A
다시 오마하고 뒤돌아서는데
자네는 잔가지 손을 흔드네
* * * * * *
<물의 혀>
저 달덩이 같은 몽돌을 보면
물의 혀가 대단하다
물의 혀는 그 촉감 얼마나 보드라운지
돌끼리 부딪쳐 깨지고
솟아난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통증조차 느낄 수 없도록
가만가만 핥아 주었을 것이다
오히려 돌의 상처를 씻어내던 혀가
갈기갈기 헤지고
닳고 닳았을 것이다.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물의 혀는
돌을 갉는 서생(鼠生)의 치열처럼 정연하고
닳으면서 또 길어났을 것이다
나도 거듭나기 위하여
바닷가에 와서 나 하나의 몽돌로 누워
단연 물의 혀를 받아들인다
5. 시인의 말
나의 시는 태반이 작자 미상의 자연을 베꼈다. 여덟 권의 시집에서 한 권의 시집을 위한 선별 작업은 난감했다. 사랑하는 자식들 중에 더 사랑하는 자식을 세우는 민망한 일이었다. 아홉 번째 시집을 내고 선집 하나로 남겨 시 쓰기를 마칠까 생각했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라 결행하게 되었다. 작품을 뒤섞어 4부로 나누었으며 일부 작품은 터럭 한 올만큼 손보기도 하였으나 매번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속일 수가 없다. 그러나 후련하다. 미루었던 숙제 하나를 풀었다. 언제까지 시 쓰는 축복을 누릴지는 모르나 내년에는 아홉 번째 시집을 보게 될 것 같은 열정으로 충만하다.
6. 추천사
나석중 시인은 덤불을 헤집고 앙증맞게 핀 작은 노루귀꽃에 깃든 설화와 장소와 노루귀의 생김새를 절묘하게 연결시켜 뛰어난 시를 창조했다. 그냥 산속의 작은 꽃의 발견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교감하는 작은 꽃의 발견인 것이다. 「노루귀」라는 시를 읽으면서 그의 인품을 자연스레 떠올려본다.
나석중 시인의 귀는 노루의 귀를 닮았다. 그는 술자리에서 스스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잘 들어준다. 잘 들어줌으로써 상대방을 배려하고 품는다. 작은 소리도 잘 듣는 노루의 귀를 닮았다. 그것이 나석중 시인의 가장 빛나는 인품이고 성품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장인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