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을 발행하며
신언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엇배기 농사꾼의 늙은 꿈>이 출간되었다. 시인의 이번 신작 시집에는 62편의 시가 5부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신언관은 현재 ‘엇배기 농사꾼’을 자처하면서 청주(淸州) 오창 들을 일구는 머리 희끗한 시인이다. 황혼 지는 들녘에서 돌아와 창공에 별이 반짝이는 날이면 트럼펫을 하늘로 향한 채 ‘밤하늘의 트럼펫’을 연주하는 멋쟁이 시인이다. 지난 시절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신언관은 이제 황혼 속에서 황혼을 향해 회한 짙은 연주를 뿜어내고 있다. 시집 <엇배기 농사꾼의 늙은 꿈>은 지난 시절 삶의 열정은 무엇이었는지, 또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리고 이제는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를 가늠하며 되돌아보고 되묻고 있다.
신언관 시인은 “도랑물은 지겹지 않은 선율로 / 지치지 않고 기도처럼 중얼거리고 있었지 / 그때 그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어 / 비록 귀뚜라미 사방에서 소리 내 울고 있어 / 그의 고독한 울음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 난 대번 알아들을 수 있었”(「부엉이」)다고 진술한다. 이 시에서 문득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고 했던 헤겔이 연상된다. 역사의 진실은 그 역사가 일단 마무리된 시점에서야 파악하게 된다. 그렇게 파악하고 난 뒤의 ‘고독한 울음’은 무엇일까. 청년 신언관은 민중 운동을 조직하고 거리에서 투쟁하던 투사였다. 신언관은 정의로운 민족사를 위하여 자기를 정립했다. 그것이 민중 해방, 민족 통일, 민주주의를 통하여 민족사적 개인이 되던 신언관의 대낮이었다면 이제 신언관은 황혼 녘에 서서 희미하게 ‘고독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울음의 의미는 어떤 배경 속에 놓여 있는가.
그 배경에는 “혁명이 떠난 그 자리에 / 탐욕과 권력이 요동치고 / 그런 자신을 / 아직도 역사의 정의라고 속이며 / 순결로 포장하여 / 자신과 시대를 능멸하고 있다 // 어느덧 뒤돌아보니 / 나의 친구들, / 진보팔이 구더기 똥통에 빠져 / 아직도 허우적대며 / 위선의 구린내 풍기고 있”(「패배자의 고백」)다는 시인의 인식이 놓여 있다. 친구이자 동지였던 사람들이 이제 ‘에이투뿔 진보’를 자처하며 ‘진보팔이’를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실망과 분노를 담아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이 비판에는 패배자로서의 과거의 자신을 포함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간 두 차례 징역 살고 / 수차례 유치장에 끌려가고 / 한때는 현상금 붙은 전국 수배령까지 당했는데 / 그리고 몇 차례 출마라는 것도 해보고 나서 / 이제야 알게 되었”(「긴 역사의 한 점이거늘」)다는 자조 투의 전언이 그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농사꾼으로 돌아가 황혼 속에 선 시인은 어떤 비전 속에 놓인 삶을 꿈꿀까. 그곳은 “젊은이들이 찡그리며 등 돌린 곳 / 꿈을 찾기엔 황량한 곳 / 별 의미 없이 늙어가는 곳 / 늘 탈출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지만, 시인의 트럼펫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래는 이렇다. “어여 오시게나, / 산과 들이 꽃 천지 / 봄바람까지 불어오니 / 목젖 열고 큰 소리로 / 같이 노래 부르세 (……) 손과 발이 덩더쿵 / 너울춤 추며 / 내 건너 고개 넘어 / 그대가 보내온 / 향기 쫓아 달려가면 / 눈 감고도 / 백 리는 쉬 가겠네”(「친구에게」)라고 말이다.
2. 지은이 소개
신언관 시인: 1955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양정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2015년 <시와문화>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곳 아우내강의 노을>, <낟알의 숨>, <뭐 별것도 아니네> 등을 펴냈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대학 재학 중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1980년 5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수도군단에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농민운동을 하며 전국농민협회 사무처장,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총무, 민주주의민족통일 충북연합 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연) 상임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창립을 주도하며 창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초대 정책실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고향(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재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톨릭농민회 청주교구연합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4
제1부
더께 13
미선나무꽃 15
엇배기 농사꾼의 늙은 꿈 16
아나방다리 18
이제야 허수아비를 알게 되다니 20
좀 솔직해지자 22
낟알의 숨 2 24
긴 역사의 한 점이거늘 25
전설─개목고개 다녀와서 26
워낭 28
일하기 싫은 어느 날 29
자줏빛 옛 포구에서 30
돌시인 32
탓할 역사는 없다 34
제2부
에이투뿔 진보 39
칠흑의 산속에서 41
패배자의 고백 44
가면 46
음모 48
한 끗 차이 52
개혁의 후예들 54
팬덤 57
국뽕 58
반미 60
뽀요이스 62
잃어버린 염치 64
사모펀드 66
누군가에게 세월호는 68
제3부
나는 73
신동엽의 기타 75
네 눈빛을 알고 있다 76
입하의 보리밭 78
이제 한숨을 멈춰라 80
지리산 친구 82
잃어버린 아포리즘 84
대하천간 야와팔척 86
부엉이 88
친구에게 90
제4부
그래, 맞아 1 95
그래, 맞아 2 96
그래, 맞아 3 97
고백 98
북한강 달빛 99
비 오는 가을밤의 편지 100
어디쯤 왔을까 102
새벽안개 104
푸념 106
강둑에 서서 108
축복 110
법공장 111
제5부
산 115
모지리들 116
망망 117
불사 118
권세 119
만남을 주저하며 120
낮잠 121
오래전 나는 보았다 122
다짐 123
수선화에게 124
그냥, 그대로 126
대장부론 127
ㅣ발문ㅣ 김승환 129
4. 본문에서
<패배자의 고백>
생명과 평화 그리고
자유와 인권을 주창하면
혁명에 반하는
개량주의라 생각하여
혁명을 망치는 독이라 여겼다
이제 혁명이 떠난 그 자리에
탐욕과 권력이 요동치고
그런 자신을
아직도 역사의 정의라고 속이며
순결로 포장하여
자신과 시대를 능멸하고 있다
어느덧 뒤돌아보니
나의 친구들,
진보팔이 구더기 똥통에 빠져
아직도 허우적대며
위선의 구린내 풍기고 있구나
사욕으로 포장된 개혁을 내세워
그렇고 그런 사기 행각으로
구차한 명줄 이어가고 있구나
그대들,
열불 나게 빨아대는 권력의 빨대에
입 안이 다 헐었구나
알량한 퇴물이 된
지난 경력과 책 몇 권으로
세상을 농락하지 말지어다
* * * * * *
<네 눈빛을 알고 있다>
산길 걷다 마주친
겨울이 슬픈
산짐승의 눈빛이 싫다
행여 해코지당하지 않을까
걸음마다 뒤돌아보는
두려운 눈빛이 싫다
배타적 영역에서 쫓겨나
생존의 절박함에 찌든
처절한 눈빛이 싫다
언젠가 떠나고 말 거라는
순리를 모를 리 없지만
서럽고 아쉬운 오늘이 있기에
아픔 가시지 않는
지금의 눈동자가 멈추지 말기를
어두워지는 하늘에 빈다
하여 금방 떠나더라도
사랑의 자취만큼은
걸어온 산길 끝나기 전
네 가슴에 남기고 싶다
* * * * * *
<수선화에게>
말라가는 수선화 꽃잎
고개 드는 데 힘에 부쳐
제 솟아난 땅으로 내리고
따사한 봄볕에
황금빛 향기 뿜어대던
살얼음 밤바람 시원했던
엊그제 기억이 또렷한데
곁에 머물던 달빛도 저물고
꽃잎에 이슬 찾아온 날도
아침 새소리 함께 할 날도
그대 발자국 소리 들을 날도
손꼽을 만큼 남았는데
꽃 피우던 시절 지나니
힘겹게 고개를 더욱 내리고
여태 고집스레 지켜온 것,
고개 들어 교만하지 않고
고개 숙여 비굴하지 않았던 것
5. 시인의 말
젊은 시절 무던히도 민중 해방을 외쳤다
민중이 해방된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생각해보자
민중은 무엇이고 해방은 또 무엇인가
군부 독재의 장기 집권 시대도 끝났고 삼만 불 소득의 선진국으로 들어선 지금,
그것이 여전히 유효한 생각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대는 민중인가 아닌가
2023년 지금 민중의 실체는 있는가
해방된 민중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며 민중 해방의 세상은 인류 역사에 있었는지?
혹은 실제로 실현 가능한 테제인지
아니면 공상의 세상, 천국 같은 것인지?
젊은 날 무던히도 외쳤던 민중 해방, 관념과 상상의 허깨비였던가?
어찌해야 잘사는 거냐고 늘 되묻는다
돌아오는 대답 또한 늘 같다
무슨 선택 어떤 결정이든 결국은 후회한다는 것
6. 추천사
농부 시인 신언관에게 농사의 마음은 곧 신심(信心)이요 시심(詩心)이다. 온갖 이데올로기가 인류의 미래를 약속하고 가상 공간과 실제가 병존하는 메타버스의 시대에도, 수억 년 빙하 속에 갇혀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팬데믹의 시대일수록, 시공을 관통하는 불변의 이치가 있다면 먹거리의 생산이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삽자루 잡고 일할 기력 있을 때가 행복한” 것이라며 비록 엇배기라도 농부로서 살아가길 다짐한다. 시인은 “꼽추의 형상으로 비쳐진 제 그림자 보고 분노할 줄” 모른다고 스스로를 질책한다.
부단한 성찰을 통해 자신을 담금질하는 노력이 여러 편의 시에 녹아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눈이 번쩍 뜨이게 한다. -윤여준(전 환경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