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의 언어, 언어 이전의 언어에 대한 탐닉과 조탁의 시”
1. 이 책을 발행하며
<저녁의 신>은 중견 시인 이학성의 네 번째 시집이다. 시집에는 59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묶였다. 이 시집은 한마디로 ‘언어 이전의 언어’에 대한 탐닉, 즉 ‘언어’에 대한 시인의 차별적 인식과 ‘문장’을 향한 시인의 열정과 고투가 담긴 시집으로, 마치 묵직한 한 권의 중세 회화집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이학성 시인은 첫 시집부터 이번 네 번째 시집인 <저녁의 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언어 이전의 언어라 할 수 있는 고전 음악에 심취하고, 오래된 중세 회화를 탐닉하면서, 예술의 촉수를 세운 소년의 마음을 지닌 자로서의, 예술의 마지막 능선인 시의 길을 찾아서, 저 먼 고갯마루로 향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특히, 높은 예술적 지평으로 산출된 이학성 시인만의 ‘마음의 문장’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열어주고 있는데, 권말에 실린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전해수는 “이러한 시(인) 의식은 산문시 혹은 이야기 시와는 다른 형식을 새로 열고 있어서 이학성의 이번 시들은 단말마적 언어 조탁이라는 뜻밖의 표현방식으로 인해 언어 이전의 추상적인 마음의 결을 모두어 다시 ‘시어(詩語)’로 재탄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녁의 신>은 시로서, 혹은 시인으로서는, ‘문장의 혁명’에 가까운 하나의 언어적 사건을 ‘시어’에 포괄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학성 시인의 언어에 대한 탐구와 그 치열성은 도저하기만 하다. “간절한 심중(心中), / 꺾이지 않는 고집스런 펜, / 고도의 집착, / 투명하게 열린 귀, / 균형 잡힌 시야, / 종이 앞에서 격분하지 않는 냉정”(「기록자학교」)이라는 ‘여섯 가지 미덕’을 갖출 때 비로소 ‘기록자’라 칭할 수 있다는 말로써 시(인)정신의 치열함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고쳐 쓸 줄 아는 부단한 인내, / 찢어버릴 줄 아는 용기, / 주체적 해석, / 말 등에 올라탄 비유, / 문장의 올바른 가치판단 외에 / 제 키 높이만큼의 눈물로 얼룩진 종이가 쌓여야”만 기록자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아가 “깊은 밤 강물이 / 뒤척이는 소리를 낱낱이 받아 적을 수 있노라”고 고차원적인 기록자로서의 시인의 자격을 자기 자신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치열한 언어의 조탁을 거쳐, 시인의 의식을 대표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경배를 담은 「펜」, 특별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산책하는 개와 주인」, 시상(詩想)을 구하기 위해 낙타를 업고 사막을 건너는 시인의 마음가짐을 담아낸 「낙타의 문장」, 프리츠 폰 우데의 <식탁 기도>를 가족들이 저녁을 위해 식탁으로 모여드는 그림으로 직관하여 읽고 그것을 ‘해 질 녘의 스토리’로 탄생시킨 「저녁의 신」 등 명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이학성 시인의 시들은, 시인의 시적 원천에서 솟아나는 듯한 ‘고요한 언어’, ‘침묵의 언어’, ‘마음의 언어’, ‘기도하는 언어’의 형식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어떤 중후한 구도적 아우라를 띠고 있는 점은 압권이기만 하다.
2. 지은이 소개
이학성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마쳤다. 199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우를 살리기 위해>, <고요를 잃을 수 없어>, <늙은 낙타의 일과>를 냈고, 산문집으로 <시인의 그림>, <밤의 노래>가 있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5
제1부
침묵 11
기록자학교 12
로랜드 고릴라 14
고아 16
성장기 18
야생의 인디언소년 20
산책하는 개와 주인 22
코 24
평평族 26
낙타의 문장 28
화부 30
떠돌이 32
첫걸음 33
상속 34
제2부
고요 37
우주적 손 38
친절한 모자 40
방문객 42
다리 밑 신화 44
저녁의 신 46
견자 48
두 대의 기타 50
브로큰하트 밸리 52
전설의 설거지王 54
전령 57
CCR 형들의 노래를 권함 58
모성적 발로 60
두꺼운 책 62
새가 물어온 저녁 64
제3부
부러진 나무 69
나귀와 오름길과 호수 70
처방 72
자신에게만 관대함 74
서사적 애인 76
초대통감의 십대훈령 78
표적 80
흠결 81
그림의 배후 82
공론의 식탁 84
Bowl 예찬 86
낡은 수도꼭지 88
편력 시대 90
깨진 창 92
펜 94
제4부
내 연애 99
불후 100
낭만의 종언 102
끽연가 103
모나미에게 106
대령의 집 108
벨라 차오, 안녕 내 사랑 110
몰두 113
잉잉거리다 115
화동 116
딱정벌레 118
새의 무게 120
자립도시 121
저녁의 신 122
바스락거림에 관해 124
ㅣ해설ㅣ 전해수 137
4. 본문에서
<낙타의 문장>
생각이 막힐 때는 낙타를 업고서 사막을 건넌다고 상상하지. 검푸른 하늘에 박힌 뭇별들을 거룩한 안내자 삼아 닷새째 나가고 있으나, 말문이 트이기 전까진 낙타를 내려놓지 않으리라 다짐하지. 꼬박 낙타를 떠메고서 사구를 넘자니 발목이 모래 무덤에 빠지고, 위안을 구실로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지만, 업힌 낙타는 마치 몹쓸 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생기를 잃고 혼곤한 잠에 빠져 있어. 그러니 어서 마을로 낙타를 데려가야 해! 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그래서라 상상을 서두르지. 아무리 병든 낙타라지만 순한 새끼 양보다 가벼울 리 있을까. 대관절 낙타를 업는 게 말이 되냐며 누구든 나서서 뜯어말릴 만도 한데 아직 그러는 이는 없어. 온종일 걸어도 낙타가 무겁게 침묵하는 까닭과 일평생 떠맡아 온 등짐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겪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어. 끈질기게 재칼의 무리가 따라붙으려 하지만, 그래도 사막을 가로지르다 보면 언젠가는 낙타의 마을에 닿으리라 터벅터벅 행로를 고집하지. 행여 지치려고 해도 그의 마을에서 새겨지게 될 문장은 무얼까, 기대와 궁금증이 혼미해지는 상상을 가까스로 부축해 세우지. 그런데 알아? 누구든지 한 번쯤은 낙타의 문장을 얻겠노라 먼 길을 헤치는 상상이야 하겠지만 낙타라는 존재는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어설프게 다가가 등을 내밀었다간 아찔한 곤욕을 치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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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신>
알맞은 어느 저녁 당신께서 찾아오셨다. 손때 묻은 지팡이를 문가에 세우더니 나직이 저녁 한 끼를 청하셨다. 어디서 그런 겸양한 음성을 듣겠는가. 갑작스런 당신의 현현(顯現)에 식구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 그럼에도 아비가 침착히 나서 당신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때마침 부엌의 화덕에서는 스튜 냄비가 괄게 끓어올랐고, 당신께서 막 앉자마자 실내의 등불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불빛이 어룽대는 식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다보시곤 제일 수줍어하는 아이를 가리키며 나이와 이름을 물으셨다. 그러곤 붉게 달아오른 막내의 뺨을 어르며 가정의 화목을 축원하셨다. 허름한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은 기름지지 않아도 저마다 정갈했으며 질그릇 부딪는 소리가 이따금 창밖을 떠도는 바람소리와 어울렸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갈 즈음 아비가 무거운 입을 열어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며 당신의 행로를 물었다. 당신께서는 갈릴리 호수 너머의 나사렛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서 그곳까지는 얼마나 먼가. 더군다나 어두컴컴하게 밤이 깊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당신께서는 우리의 만류를 뿌리치셨다. 이윽고 숙연한 저녁기도를 마치고는 지팡이를 찾아 짚으셨다. 당신의 그윽한 눈동자 속에 애타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내비쳤다. 아쉽게도 만남은 길지 않은 시간, 언제가 될지 훗날의 재회를 기약하기도 어려웠다. 컴컴한 바깥으로 향하는 당신께서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차가운 맨발이었다.
* * * * * *
<모나미에게>
묻건대 못 만드는 걸까 안 만드는 걸까
전자라면 초일류반도체 생산국이란 지위가 어색하고
후자일 경우 소비자의 호된 질타를 받아도 싸다
그깟 필기감이 물 흐르듯 부드럽고 우아하며
찌꺼기가 번져 종잇장이 얼룩진다거나
놔두고 방치한들 잉크가 말라 굳지 않는 펜 하나쯤
업계의 선구인 귀사가 여직 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애석함을 넘어 의문스러울 따름인데
가뜩이나 혐한 기류가 수그러들 줄 모르는 시국에
이 글을 꼬투리 잡아 교활한 일본 우익이
한바탕 난리 칠 게 불 보듯 빤하긴 해도
사십 년 가까이 모나미펜으로 생업을 이어온 필자가
언젠가 딸아이가 건넨 미쓰비시 펜 자루에 혹해
어쩌면 이토록 글씨의 터치가 매끄러울까
놀람과 부러움을 감추기 어려웠어도
그렇다고 내세우듯 셔츠 주머니에 꽂고 다닐 수 있겠는가
아무리 좋기로 어찌 일제를 구매한단 말인가
뼈저린 치욕의 역사가 분하지도 않으며
반성은커녕 한마디 사과에도 인색한 저들의 작태가
천불이 일도록 괘씸하지 않더냐! 호통 대신
요걸 며칠만 빌려다오, 딸애에게 속닥거린 말을
이제 와 쓸어 담을 수 없음을 책망하며
볼펜 한 자루로 저들과 우열을 겨루자는 심사겠냐만
힘으로 응대하려 든다면 힘으로 대응할밖에
분발을 독려하는 뜻에서 몇 글자 적느니
밝히나 마나 이 초고는 모나미153 시리즈로 썼다.
5. 시인의 말
바람이 드세건 잠잠하건 당신께 드리는 청은 경건했다. 거두건 외면하건 당신과 함께한 일상이 이어져 이 기록으로 남았다. 그렇듯 당신이 내 일과에 수시로 깃들였음을 의심치 않으나 이것이 사람의 기록이어서 옳고 그름을 떠나 정직성과 치밀성을 장담하긴 어렵겠다. 더러는 당신의 뜻이 누락되거나 진위가 함부로 왜곡됐으리라. 경솔과 아둔함이 덧보태져 당신께 누가 됐으리라. 과오를 되돌리긴 이미 글렀으나 그렇다고 달라지랴, 이후로도 당신께의 경배는 저녁마다 숙연하게 이어질 터.
6. 추천사
내 후배, 젊은 시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이학성도 이제 만만치 않은 나이구나. 세월의 속절없음에 새삼 움찔하며 20년도 훨씬 전 그를 떠올리는데, 우직할 정도로 순정한 눈빛과 목소리가 여전함을 시집에서 확인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이라고는 자기 하나밖에 없는 태초의 아담 같은 외로움을 안고, 시인의 고독과 자부심으로 세상의 바스락거림, 사물의 속사정을 엿듣는 이학성. 그의 바스락거림을 엿보는 시간. 딸들 손끝에는 물방울 하나 묻히지 못하게 하면서, 결벽증에 가깝게 깔끔하니 살림을 전담하는 아버지 시인의 모습에 짠하기도 하다가, 가령 CCR을 틀어놓고 ‘혼술하는’ 시인의 취흥 도도한 망상 등에는 절로 미소가 절로 떠오르고, 고샅고샅 박혀 있는 유머에 낄낄 웃었다. -황인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