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을 발행하며
도서출판 b의 ‘b판고전’ 시리즈 23권은 쥘리앙 오프레 드 라 메트리Julien Offroy de La Mettrie의 두 편의 저작 <인간기계론L’homme-machine>과 <인간식물론L’homme-plante>의 번역이다. 라 메트리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기반으로 전개된 프랑스 17세기 자유사상가들의 계보에 속하는 동시에 의사로서 당대 최신 의학 및 자연사 연구의 성과들을 자신의 유물론 철학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인물이다. 그의 의학-철학 이론은 이름을 밝히지 않거나 여러 필명으로 발표한 짧은 팸플릿에서 찾을 수 있으며, 18세기 후반 프랑스 유물론 및 의학과 생리학 이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말 사드 후작은 특히 라 메트리의 열렬한 독자였으며 그의 소설 작품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과학 및 철학 담론의 근거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라 메트리의 것이다.
라 메트리는 무엇보다 의학을 전공하고 당대 유럽의 최고 의사였던 네덜란드의 부르하버를 사사했다. 당대 철학계의 주류였던 형이상학의 사변은 새로 발견된 단순한 과학적 실험 하나로 그 기반이 무너질 만큼 허약하면서도 오만했다. 라 메트리의 <인간기계론>과 <인간식물론>에는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과학 지식들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만, 그가 이 팸플릿들을 썼던 18세기 초반의 상황과 비교해본다면 그 지식들은 사실상 과학의 최전선에서 논쟁되던 것들이었다.
특히 <인간기계론>은 인간을 정밀하고 세심한 태엽으로 구성된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신학자들과 형이상학자들의 분노를 샀고 당연히 소각 처분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라 메트리는 프랑스를 떠나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으로 피신하게 된다. 라 메트리는 의사의 눈으로 사람들의 건강과 질병은 신체의 구성에 달렸으며, 의지와 정신의 힘이 사실상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확인했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영혼의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그에게 영혼의 작용은 신체 조성의 다양한 변화에 불과하다. 의사로서 라 메트리는 그런 사례를 무수히 확인했고, 따라서 형이상학적 심신이원론은 그저 인간을 모르는 철학자들이 쓴 소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라 메트리에게서 기계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 우리의 생명은 긴밀하게 결합된 태엽과 톱니바퀴의 자발적 운동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어떤 경이도, 어떤 기적도 없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면 기계의 구조가 보다 복잡하고 구성 요소들이 대단히 섬세하다는 것뿐이다. 기계로서의 이런 완전성과 통일성을 갖춘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확인할 길 없는 요소들을 굳이 집어넣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라 메트리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그에게 인간은 선을 향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작동하는 기계이다. 선은 즐거움이며 악은 고통이다. 따라서 인간은 관능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과 근심을 멀리하도록 설계된 기계이다. 그가 제시한 과학적 논의는 이미 상식이 되었지만, 그가 노골적으로 드러낸 도덕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섬뜩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라 메트리를 둘러싼 평가는 이 둘 사이를 부단히 오간다.
2. 지은이 소개
■ 쥘리앵 오프레 드 라 메트리(Julien Offroy de La Mettrie, 1709-1751)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항구도시 생 말로 출신. 성직자로 만들고자 했던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얀센주의 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내 그만두고 파리대학 의학부에 등록했다. 그러나 랭스로 옮겨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네덜란드 레이덴으로 가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이름난 의사였던 부르하버를 사사했다. 귀국하여 부르하버의 저작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것으로 저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영혼의 자연사>(1745) 및 <인간기계론>(1747~1748)의 출간으로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인물로 단죄된다. 그의 동향인으로 베를린 아카데미를 주재하던 피에르 루이 드 모페르튀가 프리드히리 2세를 설득해 라 메트리를 베를린으로 초정하도록 했고, 3년 동안 프러시아 계몽군주의 보호를 받았는데 정작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그의 탐식과 식도락이었다.
라 메트리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체계나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공격하고자 하는 주제나 인물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상반된 의견을 취했고, 동시에 위험한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고 몰릴 수 있는 부분에서는 슬쩍 발을 빼면서 일종의 줄타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 메트리의 주장은 무엇보다 종교를 위시한 모든 권위에의 저항, 개인주의, 인간의 행복은 관능의 추구 이외에 없다는 것인바, 이 내용은 고스란히 18세기 말 작가 사드의 이론적, 사상적, 정치적 토대가 된다.
■ 이충훈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파리 제4대학에서 <단순성과 구성: 루소와 디드로의 언어와 음악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프랑스학과 부교수이다. 디드로의 <미의 기원과 본성>, <백과사전>, <듣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농아에 대한 편지>, <자연의 해석에 대한 단상>, 장 스타로뱅스키의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자유의 발명 1700~1789/1789 이성의 상징>, 사드의 <규방철학>, 모페르튀의 <자연의 비너스>, 장 자크 루소의 <정치경제론ㆍ사회계약론 초고>, 필립 피넬의 <정신이상 혹은 조광증의 의학철학 논고> 등을 번역했고, 저서로 <자연의 위반에서 자연의 유희로> 등이 있다.
3. 차례
ㅣ출판업자의 일러두기ㅣ 7
ㅣ괴팅겐 의학 박사 할러 씨에게ㅣ 11
인간기계론 23
인간식물론 117
ㅣ옮긴이 해제ㅣ 149
ㅣ미주ㅣ 169
4. 옮긴이의 말
그의 주저 <영혼론>과 <인간기계론>에서 라 메트리가 공격하는 주요 주제는 바로 영혼이다. 그리고 그는 신체와 영혼을 구분하면서 이들 각각에게 연장과 사유라는 속성을 부여한 데카르트의 체계를 문제 삼는다. 수동적인 물질을 운동하게 만드는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우리 몸속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서구 철학사 및 의학사에서 언제나 논쟁적인 것이었다. 라 메트리는 영혼의 자리를 송과선(松科腺, la glande pinéale)에 두었던 데카르트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영혼론>에서 “데카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신체와 영혼은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본성을 갖는데, 신체는 운동만 가능하고 영혼은 지식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영혼이 신체에 작용하는 것도, 신체가 영혼에 작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신체가 움직인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은 그 운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영혼이 사유한다고 가정해보자. 신체는 운동만을 따르므로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쓰면서 상이한 속성을 가진 두 실체가 있다면 이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을 뿐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라 메트리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다. <성찰>의 여섯 번째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신체는 본성상 가분적이고 정신은 전적으로 불가분하다는 점에서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대단히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전제한 뒤, “정신이 신체의 모든 부분의 자극을 즉각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뇌로부터, 혹은 뇌의 가장 작은 부분 중 하나의 자극을 받”는다고 본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뇌의 가장 작은 부분은 둘로 나뉜 좌뇌와 우뇌 사이에 존재하는 송과선이라는 아주 작은 샘(腺)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의 동시대 철학자였던 가상디는 데카르트의 송과선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결국 연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상디는 연장을 갖지 않는 영혼을 전제하는 데카르트의 체계에서 설령 이 송과선을 “수학적인 점”으로 생각한대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 라 메트리가 데카르트의 신체와 영혼의 결합 문제와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영혼의 자리 문제를 반박할 때 그는 바로 이런 가상디의 비판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다. “영혼의 자리가 어떤 연장을 갖는다면” 영혼은 “신체라는 다른 거대한 연장과 즉각적으로 맞닿아 있으므로 어떻건 연장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영혼이 물질이 아니기에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없거나, 영혼은 신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촉하고 움직이므로 사실상 물질인 것”이라는 양자택일의 선택만 남는다. -<옮긴이 해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