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잊혀가는 것들의 회복을 꿈꾸는 웅숭깊고 따듯한 시편들”
1. 이 책을 발행하며
윤재철 시인의 제9 시집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온 달빛>이 출간되었다. 62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묶였다. 시집에는 해설이나 발문, 추천사를 생략한 채 시인의 시작 노트 성격의 에세이가 권말에 붙어 있다. 시력 40년을 넘긴 윤재철 시인의 시세계는 그간 많은 부분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대응하는 생태적인 탐색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번 시집도 그 주제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시에서 향하는 시선은 더욱 웅숭깊기만 하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추억, 자연과의 조화와 뭇 생명에 대한 외경은 단지 생명체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 연민만이 아니다. 시인은 생태 문제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생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시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는 것이 이 시집을 읽는 재미와 의미일 것이다. 그 가운데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도심의 작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꽃들에 관한 시들이 있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큰길가의 “문도 없는 시온교회/연초록 메시펜스 더위잡고/메꽃 덩굴줄기가 올라간다//보아주는 사람도 없지만/(…)/하늘을 향해 나팔”을 부는 메꽃을 만나고, 흔히 민들레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아뿔싸! 고들빼기 고것이/방배역에서 서울고등학교/넘어가는 고갯길/효령로 차도 옆 화단에/무리 지어”(「차도 옆 화단에 고들빼기」) 핀 것을 발견하고 오래전 김치를 담가 먹던 추억을 떠올리며 민들레와 고들빼기의 생김새를 확실하게 새겨두기도 한다. 또 “강남의 귤이 회수를 넘으면/탱자가 된다는 것도 옛말/제주 감귤나무/푸른 잎에 주렁주렁 노란 불 밝히고/서울 가까울수록 더 생생하다는구나”(「감귤나무의 북상」)라고 감귤나무의 북상 소식을 환기하고, “빙하기 때 번창하다가/추운 날씨가 물러가면서는/높은 산을 피난처 삼아/끈질기게 살아남았다는 구상나무//한국 특산종인데 어떻게/유럽에 반출되어 그곳에선/한국전나무(Korean Fir)라 부르며/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가 높다는”(「구상나무의 떼죽음」) 구상나무가 기후 변화에 못 이겨 죽어가는 사태를 말할 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태계 구성원의 생존 문제라는 시인의 인식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삶과 문학의 생태적 회복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리라. 생태계의 교란과 위기는 “쪽박산이라고도 하고/쪽박을 엎어 놓은 것처럼/동그랗게 생겨 똥그랑산이라는데//방배동 천촌말 근처에 있었다는데/언제 어떻게/소리 소문도 없이/불도저가 마을을 밀어버리고/산도 밀어버”(「똥그랑산 혹은 쪽박산」)리고 도로를 내고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등의 이윤을 향한 무분별한 개발이 큰 못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단지 가까이 있지만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지점이나 사물에만 가 닿는 것은 아니다. “한 우크라이나 할머니가/완전 무장한 러시아 병사에게 다가가/(…)/너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야/네가 이 땅에 쓰러지면/네 시체는 썩어 그 속에서/해바라기가 자랄 테니/네 주머니에 해바라기씨나 넣어둬라”(「해바라기는 검은 얼굴을 가졌다」)라고 말하는, 우리가 사는 지구 반대편의 해바라기씨 기름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우크라이나 할머니의 심정에 공감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이 단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산 기장밥을 먹으며/나는 오늘 안녕한가/한 공기 기장밥/시금치나물에 된장국 떠먹으며/나는 지금 안녕한가”(「우크라이나산 기장밥을 먹으며」)에서 보듯 한국의 된장국에 우크라이나산 기장밥을 먹는 지구적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우크라이나는 결코 먼 나라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자연의 사물이든 사회적 관계에 놓인 대상이든 시인의 시선에는 모두 생존적 삶의 관계로서 포착되는데 그 시인의 시선이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 지은이 소개
윤 재 철 195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초·중·고 시절을 대전에서 보냈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1981년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메리카 들소>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세상에 새로 온 꽃> <능소화> <거꾸로 가자> <썩은 시> <그 모퉁이 자작나무> 등과, 산문집으로 <오래된 집>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1996)과 오장환문학상(2013)을 받았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5
제1부
수선화 그것이 보고 싶다 12
목마른 매화나무 14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온 달빛 16
여의도공원 히어리 18
산국 20
곰취가 꽃을 피웠네요 22
풍탁 24
왕궁리 똥막대기 26
지금 코카서스산맥 너머에는 29
박수근 나무 30
아무도 튤립나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32
하얀 인터넷선 34
메르세데스-벤츠 빌딩 앞 풍경 36
우크라이나산 기장밥을 먹으며 38
해바라기는 검은 얼굴을 가졌다 40
고독한 시위자 42
제2부
정오에 걷는 방배로 46
한 사람이 섬이 되었다 48
메쉬펜스 오르는 메꽃 50
45년 된 삼호아파트 벚꽃 52
산촌집 목련나무 53
딱 열한 송이 54
무관심이 행복한 꽃 56
땅강아지도 떠났다 58
대지이용원 앞 냉이꽃 60
붉은 벽돌 틈에 노란 괭이밥풀꽃 62
전봇대 위의 솜틀집 64
차도 옆 화단에 고들빼기 66
우리 동네 다이소 68
어머니의 금이빨 70
길거리 구두수선방 72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진다 73
제3부
불량한 참외들 76
소소한 감정은 얼마나 먼 거리냐 78
캘린더는 추분 나는 80
구상나무의 떼죽음 82
계약 재배 장다리꽃밭 85
고사리꽃 86
누렁소와 참새 88
고놈들 눈빛 때문에 90
웨하스 한 봉지에 소주 한 병 92
세월 건너는 섬 94
동강할미꽃 96
꽃망울만 발롱발롱 98
내 이름은 아이리스 99
이제 소를 보려면 마트에 가야 한다 101
제4부
아득이 지명 104
꼴두바우 진달래꽃 106
몽마르뜨공원에는 아카시아꽃 향기가 숨어 살지 108
콜롬비아산 백장미 110
도팍골 돌담길은 경계가 없다 112
구례 산동마을 산수유 114
글씩이모팅이 116
우리 동네 쇠면이 118
오리산은 배꼽산 120
고성 아야진항 122
감귤나무의 북상 123
봄날 이수나루터 126
서래섬은 추억 속에 붐빈다 128
방배동 새말어린이공원 130
똥그랑산 혹은 쪽박산 132
도구머리 고갯길 134
ㅣ시작 노트ㅣ 시의 생태적인 회복을 꿈꾸며 137
4. 본문에서
<해바라기는 검은 얼굴을 가졌다>
한 우크라이나 할머니가
완전 무장한 러시아 병사에게 다가가
네 주머니에 해바라기씨나 넣어둬라라고 말했을 때
검은 해바라기씨는
저격수의 총알보다도 더 깊숙이
러시아 병사의 가슴을 뚫었다
너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야
네가 이 땅에 쓰러지면
네 시체는 썩어 그 속에서
해바라기가 자랄 테니
네 주머니에 해바라기씨나 넣어둬라
이 파시스트 점령군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이탈리아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이 검은 땅 위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
눈 덮인 시체마다
검은 해바라기씨를 입에 물었다
광활한 흑토지대
검은 땅에 부러진 창처럼 박힌
해바라기는 봄이면 노란 꽃 피우고
가을이면 눈물처럼
얼굴 가득 검은 씨를 맺어
우크라이나 평원을 덮었다네
지금 다시 너는
러시아 병사의 이름으로 오고
검은 수렁을 탱크가 휘젓는다
그러니 네 주머니에도 해바라기씨나 넣어둬라
네 주검 속에서도 봄이면 해바라기
운명처럼 푸른 싹을 틔우리라
* * * * * *
<한 사람이 섬이 되었다>
누구나 외로우면
섬이 된다
차들 쉬임없이 내달리고
사람들 물밀듯
건너가고 건너오고
발자국 아무리 많아도
외로우면 섬이 된다
바람 불지 않아도
물결 찰랑이는 갯바위처럼
혼자 섬이 된다
이수역 사거리
느티나무는 노란 단풍잎 날리고
비둘기는 보도 위를 아장거리는데
벤치 위에 소주병 하나 뉘어 놓고
한 사람이 신문지로 얼굴을 덮고 잠들었다
누구도 외로우면
섬이 된다
흘러가고 흘러오는 사람의 물결 속
구두 뒤축 꺾어 신고
한 사람이 섬이 되었다
* * * * * *
<글씩이모팅이>
남해섬 이동면 석평마을
글씩이모팅이는
글씬몽팅이라고도 불렀는데
해안에서 돌아 들어가는 산모퉁이
큰 바위에 글씨 새겨져 있어
글 쓰인 모퉁이가 변하여
글씩이모팅이가 되었다는데
지금부터 20여 년 전만 해도
국도 확포장 전만 해도
향을 두룡개 아래에 묻어
미륵부처님께 바친다는
한문이 새겨진 바위가
길 바로 옆에 있었다는데
유식한 이라면 매향비라 불렀을 텐데
무식한 이에게는 그냥 글씨 쓰인 바위
글씨보다는 마음
갯벌에 향나무를 묻어
천년이면
미륵님께 올릴 침향이 된다고 믿었던 마음
미륵님 기다리던 마음
이제 오랜 세월 지나
단지 천년의 향기
기다리던 마음만이
길모퉁이에 서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바라고 있다
5. 시인의 말
도시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흙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씀바귀는 보도를 뚫고 솟아올라
빗물을 받아 마시며 산다
한 울타리 안에
한 하늘 아래
구두수선 부스에 앉아
고들빼기가 혼자 유튜브를 보고 있다
대지이용원 화단에 사는
사루비아가 머리 깎으러 오라고
카톡을 했다
이발소 의자에 판때기 걸쳐 놓고
바리캉에 잔뜩 겁먹은 채
상고머리 꼬맹이가 거울 속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