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자신의 삶과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질문”
1. 이 책을 발행하며
유종 시인의 첫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이 출간되었다. 유종 시인은 2005년에 등단 절차를 마쳤는데 철도원으로 평생을 일하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은퇴를 한 뒤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두하며 첫 시집을 펴내게 되었다.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57편을 담았다. 제1부에서는 시인의 생활 속에서의 정서가 담긴 시들을, 제2부에서는 오랫동안 철도노동자로 살아오는 과정의 체험들이, 제3부에서는 현실에 대한 시적 사유들을 담고, 제4부에서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삶으로서의 응전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면서 자신의 내면과의 근원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시편들로 채웠다.
그 가운데 특히 시인 자신의 노동 체험 속에서의 삶을 노래한 시들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가령, “안개 자욱한 철길 / 철야 작업 끝 쓴 입맛 다시던 / 무개차 위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 두꺼운 밤의 겉옷 한 꺼풀씩 벗겨내면 / 새벽이 오고, 또 새벽이 오고 / 그리고 또 허기진 새벽 / 아내와 어린아이들 뒤로하고 / 안개에 묻혀버린 젊은 철도원 눈동자 / 밤은 고요하고 거룩”(「고요한 밤 거룩한 밤」, 부분)한데 죽음을 향해 이루어지는 노동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시인/철도노동자에게, 혹은 돌아오지 않는 남편/아버지를 둔 유가족에게 어떤 삶의 위로를 전해야만 할까.
혹은, “불심검문당하는 것보다 퇴근하면서 사물함에 처박혀 있던 기름때 묻은 작업복이며 고린내 나는 양말 따위 욱여넣은 가방을 용케 잊어버리지 않고 하루 종일 메고 있었는데, 자꾸 속을 열어보려 하는 차석이 괘씸하여 기 쓰고 가방 붙잡고 있었는데, 방위놈 둘이 합세하는 바람에 기어코 속이 뒤집혀버렸네 절어 있는 며칠 치 땀내가 쏟아져버렸네”(「왜 그랬는지」, 부분)라며 철야를 마치고 퇴근을 하는 길에 파출소 앞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며 기름때와 땀내에 전 작업복 가방을 강제로 열어 보이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수치심과 그로 인한 서러운 회억을 토로한다.
그런데 삶에서의 이러한 슬픔이나 고통, 수치심 등을 드러내면서도 시인은 감정이 고조되거나 불필요한 목청을 돋우지 않고 차분한 애도와 성찰을 통해서 시를 단단히 영글게 만든다. “젊은 여자가 기관차에 부닥쳐 죽”은 사태에 즈음하여 크나큰 정신적 충격 속에서도 “기관사”나 “동료”들의 반응을 철도노동자의 즉자적 반응이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시집의 뒤에 발문을 붙인 시인 임동확은 “어떤 집단의식과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립적 개인성의 “촉수”에 따라 한 “여자의 비극적 종말”과 그와 관련된 “기관사의 실종”(「죽음에 관한 보고」) 사태를 다루고 있“다면서, 유종 시인은 ”한 인간이나 사태를 대하는 데 있어 어떤 편견이나 왜곡에 기초한 신념이나 이념, 상투적인 인식이나 상상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간 삶의 심오함과 세계의 심원함 그 자체로 인식하려는 내재성의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고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2. 지은이 소개
유종 시인: 1963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2005년 광주전남 작가 신인 추천 및 시평 여름호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했다.
3. 차례
시인의 말 5
제1부 그림자놀이
그림자놀이 13
월선리 14
문 15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16
옛날 사진 18
집 20
가족의 해체 22
함포 24
절명 26
낮술 28
나이 30
학천 31
음 양 32
새, 새가 난다 34
눈물의 유아기 36
제2부 푸른 독을 품는 시간
푸른 독을 품는 시간 41
뻰찌 43
승강문을 열다 44
소통 46
생 47
후야 48
세차 49
죽음에 관한 보고 50
파업 52
귀족 54
왜 그랬는지 56
루시 58
향우사업소 김 여사 59
고요한 밤 거룩한 밤 61
제3부 시인
시인 65
영동에서 66
고독사의 쓰임새 68
말들의 최후 70
8433호 71
성주 72
몽탄 가기 전에 74
공소 시효 75
안녕 77
망각 78
노안 80
성은당 82
신호등 84
테를지의 밤 85
제4부 나무는 나무
사랑을 잃었다면 89
무등을 바라보며 90
국밥 92
그날 이후 94
흰 꽃을 엿보다 96
피젖 97
폭설 98
시위 시위 100
미얀마로부터─봄 102
가거도 104
시칠리아의 암소 106
창불 108
전라도 여자 110
나무는 나무 111
ㅣ해설ㅣ 임동확 113
4. 본문에서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부족한 시간 보충하려
시간 밖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지요
기름밥 땀나게 먹던 시절은
사실 푸른 독 데쳐 먹던 날들을 이어 붙인 것 같았지요
시간 밖에서 시간을 끼니처럼 때우던 푸른 시절은
우리밖에 부를 수 없는 흘러간 유행가 같아
늘어진 빨랫줄에 매달린 낡은 작업복 같아
곰곰이 되짚었어요 결함을 찾을 때까지
몇 번을 되짚어가다 꼬박 날 샜던 것처럼
어떤 겨울날은 시간 위에 시간을 껴입었어도
원인불명으로 기록되었지요
그런 날은 차라리 냉정하게 모든 원인을 짓이기고 싶었어요
시간 밖에서 공복을 달래는 술병이 적금
깨서 탕진한 눈물 같았어요
인과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흐르더군요
지금은 한 시절 철로 위를 걷던 동지들에게
손 내밀어야 해요
푸르게 눈 뜨던 시간 푸르게 빛나던 출발신호기와
푸른 작업복과 시간 밖 푸른 청춘에게
알맞게 데쳐져 입맛 다시던 푸른 독들에게
이제 안녕 작별의 손 내밀어야 해요
이제 안녕
* * * * * *
<향우사업소 김 여사>
이것저것 안 해본 일 없지만 딱히 잘하는 일도 없어 못하는 일도 없어
손맛 좋다는 말에 백반집 차렸다가 털어먹고 입맛도 살맛도 잊어버려 세상살이 흐지부지할 때 딱 일 년만 해보라는 친구 말에 기차 쓸고 닦는 향우사업소 들어왔는데
한 일 년 해볼까 하다가 애들은 커가지
서방은 골골하지 밖에 나가봐야 거기서 거기
몇 년 더 버텨 옛날 식당 했던 손맛으로 작은
분식집이라도 차릴까 하다가 잘못하면 입맛도 세상 살맛도 영영 버릴 것 같고
애들 취직하면 그만둬야지 하다가
골골하던 서방 죽고 애들은 벌써 시집 장가들어 손자도 봤으니 쉬어야지 하다가
혼자 집에 들앉아 봤자 속만 허전할 것 같고
삭신도 예전만 못해 어깻죽지에 파스 떨어질 날 없어
올까지 하고 그만둬야지 하다가
늘그막에 밖에 나가면 누가 받아주나
손자들 용돈벌이라도 해야지
그러다 보니 이십 년
생전에 기차 청소할지 몰랐네
차 쓸고 닦는 일로 늙어버릴 줄 몰랐어
남 발자국 손자국만 닦을 줄 알았지
원수 같은 서방 밥숟가락이라도 들 때 손 한번
닦아줄 것인데
이왕 갈 것 깨끗하게 해서 보낼 것인데……
그래도 손자 하얀 손 쳐다보면 이뻐 죽것어
꺼칠한 내 손가락 잡고 꼼지락거리는 것 보면 이뻐 죽것어
* * * * * *
<시칠리아의 암소>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고백했지만
끝내 건너가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눈감지 못한 아이들이
그대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남아 있는 거리
산 사람들의 도시를
요나의 눈으로
판관의 눈으로 보는구나
거리에 속 깊은 눈들이
지금 당신을 보고 말하는구나
맹골의 물길 거슬러 신발이 벗겨지고
손톱이 닳아빠지도록 싸웠던
무섭고 서러웠던 마지막 사투를
구명조끼 갑옷처럼 두르고
거짓과 음모와 배신 앞에서
움켜쥔 주먹으로 치 떨리던 입술로
증언하고 있구나
질곡의 사월 또 사월
뒤틀린 욕망 짊어지고
시칠리아의 암소에 갇힌 자들이
그대들의 이름 부르며 울부짖는
신음소리 가득한 휴일 한낮이여
우리는 평생 소처럼 울부짖으며
그렇게
통한의 한 세월 건너가겠구나
5. 시인의 말
살면서 삼 일을 넘지 못한 작심(作心)
을 다하면 못해도 내 적막에 닿는
숲길 하나쯤 내지 않았을까
오래 입었던 푸른 작업복을 그 작년 벗은 것 외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들……
거의 잊거나 떠나보냈으나
시,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으니 애처롭다
호롱불처럼 흔들리던 불면의 밤들
비로소 밖으로 내몬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리라
6. 추천사
가둘 수 없는 등 푸른 영혼에 몰매를 맞은 것이다. 푸른 독은 굴욕처럼 높고 거부할 수 없는 저주의 주문, 마법처럼 비참하게 거대했을 것이다. 뼈마디를 새하얗게 들어내며 멈추지 않는 자학 천길, 절벽의 길을 뚫는 파도의 고독한 구도자 같은 수행이 그러할까.
어쩌면 시인은 날마다 병처럼 돋아나는 별의 날개를 꺾어 해독되지 않는 스스로를 아득한 사막의 불새처럼 태우며 불꽃을 피우는 존재일 것이다. 유종 시인의 푸른 독은 마침내 치명에 이르러서 그는 끝내 시마의 중독에 빠져 간절하게 죽어갈 것이다.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 첫 시집이라니, 세상을 번쩍 들어 축하한다. 도대체 이런 순정한 시인의 시집이 어디에 다시 있을까. -박남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