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대안적 사회 구조와 삶의 방식은?”
1. 이 책의 소개
<코뮨의 미래>는 서울시립대 철학과에서 25년간 재직한 이성백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여 이성백 교수와 뜻을 함께하거나 직접 사사 받은 후배, 제자들의 글을 묶은 책이다. 필자들은 그동안 철학계는 물론 진보평론(현 뉴래디컬리뷰), 맑스 코뮤날레, 교수노동조합 등 여러 진보적 사회 실천과 연관된 지식인 운동에 동참했던 이성백 교수의 뜻을 새겨 각자가 현시대에 필요한 사회철학, 비판적 사회이론을 개진하고 대안적 사회 구조와 삶의 방식을 모색한다.
이 책에서 필자들은 재앙적 상황이 펼쳐지는 현재를 위기의 시대로 인식한다. 재앙적 상황이란 세계적으로는 혐오 범죄, 전쟁과 기후ㆍ식량 위기, 후퇴하는 난민 인권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목격하는 노동 기회의 부재, 여성 혐오, 불평등의 고착, 생태계 파괴, 이어지는 고통의 체험, 나아가서는 혐오 감정의 확산 등을 포함한다.
이 책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위기 상황을 극복할 방안은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중첩적으로 짜임 관계를 이루는 집단지성의 실천 속에서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여러 논자들의 동참을 기획하여 그 목소리를 담았다. 무한 성장, 계급과 젠더 불평등, 혐오와 증오, 자연의 역습 등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여러 위협 요소를 마주한 만큼 여러 목소리의 진단이 나온다.
이를테면, 서영표는 현재 우리의 사회적 연대가 붕괴되는 상태인 아노미적 증상을 노동의 가치 불인정, 불로소득 추구와 투기, 경쟁주의적 생존 투쟁, 포퓰리즘 등 네 개로 요약한다. 불안정한 고용과 부족한 소득 때문에 부채 경제가 확대되고 청년들마저 학자금 대출로 미래를 담보 잡힌다. 노동의 기회조차 불규칙한 조건에서 미래에 대한 준비는 투기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고, 가망 없는 불로소득 추구에서 패배한 다수가 강렬한 고통과 좌절을 맛본다. 타자의 고통을 공감할 여유도 여지도 없다. 이러한 강렬한 고통 체험에 인종, 종교, 성별, 성 정체성이 덧씌워졌을 때 혐오의 감정이 싹튼다.
한상원은 인류는 더 이상 풍요로운 미래와 지구의 붕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전제하고, 피할 수 없는 환경 대재앙과 파국적인 미래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탈성장을 들었다. 탈성장은 마이너스 성장이나 경기 침체로 바뀌어 실업, 경기 파산 등을 일으킬 것으로 여겨 거부감을 갖지만, 탈성장의 진정한 핵심은 ‘성장을 위한 성장’, ‘이윤을 위한 이윤’의 논리와 작동 방식을 중단시켜 지속 가능한 사회체제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필자들은 현재 우리가 재앙적 상황에 처해 있는 데도 이런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진단하고 토의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공감 능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공통 인식의 지반에 서 있다. 상황에 대한 공감의 마당이 필요하고 여기서 공감의 능력을 강화하여 상황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실천하는데 맑스주의자들의 ‘코뮨’, ‘코뮤니즘’을 주목한다. 21세기에 사는 인간 사회가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그려왔던 청사진대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간파한다. 그렇다면 필자들은 어떤 언어로, 어떤 이론적 전망을 통해 오늘날 필요한 ‘코뮨’을 사유하는가, 코뮨의 미래는 무엇인가가 <코뮨의 미래>에 들어 있다.
2. 필자 소개
■ 이미라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생계형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회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북유럽의 한 국가에 잠시 머물다가, 50대 중반의 나이에 서울시립대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발리바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수료 후, 현재 연희궁 지4호에서 건강하게 먹고 걸으면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을 연구 주제로 학위 논문 집필 중이다.
■ 박영균
정치 사회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건국대 대학원 통일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성백 선생님과는 귀국해서 소비에트철학을 발표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만났으며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현대 정치철학과 도시 공간학 등을 화두 삼아 평생의 스승이자 학문적 벗으로 삶을 나누어왔다.
■ 신재성
서울시립대에서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논문으로는 「헤겔의 시민사회ㆍ국가론의 재고찰」, 「스피노자의 정치이론: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를 중심으로」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탈산업사회에서 포스트모던사회로>(공역), <헤겔의 신화와 전설>, <경험의 노래들> 등이 있다. 현재는 대안학교 ‘더불어가는배움터길’에서 길잡이 교사로 재직 중이다.
■ 서영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University of Essex에서 사회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 코뮌>, <불만의 도시와 쾌락하는 몸>을 펴냈고, <민중: 영국노동계급의 사회사 1910-2010>을 번역했다. 환경사회학, 도시사회학, 사회학이론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였던 영국 신좌파운동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 <진보평론>과 <문화과학>의 편집진에 참여했다. 2012년부터 제주대학교 사회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 윤수종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농업생산조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자유의 공간을 찾아서>, <욕망과 혁명>, <자율운동과 주거공동체>, <농촌사회제도연구>, <농업생산조직사례연구>, <해남수세투쟁>,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등이 있으며, 엮은 책으로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소수자운동>, <소수자운동의 새로운 전개>, <소수자들의 삶과 문학>, <소수자들의 삶과 기록>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네그리(<제국>), 가타리(<분자혁명>), 라이히(<오르가즘의 기능>) 등 자율사상에 관련한 저자들의 책 30여 권이 있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활동에 이어 <진보평론> 편집에 오랫동안 관여해 왔고 현재 전남대학교 사회학과에 재직 중이다.
■ 박종성
서울시립대 철학과에서 맑스의 상품 장 분석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철학자의 서재>1, 2(공저), <B철학>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현재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 정병기
베를린자유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이탈리아 정당 정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포퓰리즘>, <정당 체제와 선거 연합: 유럽과 한국>,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 등이 있으며, 유럽정치연구회 회장, 서울대학교 강의교수 및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직 중이다.
■ 오창룡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로 <프랑스 지방자치와 도시문화>, <오늘날의 유럽>, <불평등과 재분배의 정치학>, <현대포퓰리즘>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제왕적 우파 권력은 덧없이 사라지는가?」, 「포퓰리즘은 위기의 정치를 구하는가?」, 「프랑스의 아나코 포퓰리즘」 등이 있다. 고려대 EU센터 및 고려대 노르딕-베네룩스 센터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 한상원
서울시립대 철학과에서 맑스의 물신주의 개념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아도르노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 역사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성찰>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공동체의 이론들>,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역사와 자유의식: 헤겔과 맑스의 자유의 변증법> 등이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부장, 참여사회연구소 운영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고 있다. 현재 충북대학교 철학과에 재직 중이다.
■ 이성백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국교수노조 정책기획실장, 진보평론 편집위원장,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소장,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폴리스의 양가성과 도시인문학의 모색>(공저), <현대철학과 사회이론의 공간적 선회>(공저), <서울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탈산업사회에서 포스트모던사회로>, <현대사회의 새로운 이론들>(공역) 등이 있다.
3. 차례
서문─위기의 시대, 오늘의 코뮨 7
이미라─능동적 힘과 정치 11
박영균─맑스주의와 어버니즘, 그리고 노동자 계급 해방운동 45
신재성─스피노자의 정치이론: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를
중심으로 71
서영표─오늘날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13
윤수종─의식과 언어에서 무의식과 기호로─펠릭스 가타리의
사유 실험 145
박종성─자기중심적 사람, 그리고 노동력과 능력 175
정병기─포퓰리즘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발흥 배경과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응 191
오창룡─‘표류’에서 코뮨으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안 사회 구상 213
한상원─해방된 사회는 ‘생산력의 진보’를 수반하는가?
: 아도르노와 탈성장 담론 245
이성백─중세 코뮨: 코뮤니즘의 역사적 기원
: 중세 도시의 사회철학적 해석의 시론 275
필자 소개 317
4. 책 속에서
오로지 가치법칙의 관철만을 실재로 왜곡하는 경제학적 논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지탱하는 외적 한계들, 프런티어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들 자신의 내적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마주침과 자각을 경제학적 논리에 의해 평면화된 세계 인식을 비판할 수 있게 한다. 이제 사람들은 여기로부터 경제학적 논리/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짓눌려 있는 몸과 무의식의 신호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연적 존재인 스스로를 알게 되고, 자연적 존재이기 위해서는 사회적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이런 자각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체험되기에 하나로 수렴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마주침과 자각이 준 자본주의 거부의 몸짓은 숙의 과정에 의해 사회주의 정치로 도약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찾아야 할 사회주의의 출발점이다. -(<서영표─오늘날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44쪽)
다시금 현실에서의 노동을 살펴보자.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만 노동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그를 이용한다(착취한다).”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력을 소유한 사람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노동력의 사용권, 이용권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의 것이 된다. 바로 자본가의 노동력의 사용, 이용은 착취이다. 맑스의 언어로 말하면, 잉여가치는 착취와 같은 말이다. 잉여가치의 비밀은 노동력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복시키고자 슈티르너는 노동자의 엄청난 힘을 믿고 있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파업이다. -(<박종성─자기 중심적 사람, 그리고 노동력과 능력>, 187쪽)
포퓰리즘이 반민주적 현상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거나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반사적 효과나 의도하지 않은 효과에 그친다는 판단은 구포퓰리즘과 극우 신포퓰리즘에 해당할 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적어도 신포퓰리즘 등장 이후의 포퓰리즘은 대의 민주주의 범주 안에 존재하는 다른 하나의 민주주의 유형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신포퓰리즘이 자유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면, 개인주의 인민관까지 수용한 포스트포퓰리즘은 다원적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 (<정병기─포퓰리즘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발흥 배경과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응>, 211쪽)
그러나 이들은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경구로 환원될 수 없는 ‘진지한 유희의 투쟁’을 깊게 분석하고 실천했다. 촛불시위가 한국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지양하고자 했던 새로운 혁명의 흐름이었는지, 혹은 단순히 정권 교체를 시도한 제한된 형태의 사회 운동이었는지 여전히 평가가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광장의 대중 축제가 현재 멈추었다는 사실이며,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축제로서의 투쟁’이 어떠한 가치를 갖는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른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착취 구조에 대한 분석만큼이나, 소외의 집단적 극복을 매개하는 놀이와 축제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작업이 동등하게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창룡─‘표류’에서 코뮨으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안 사회 구상>, 242-243쪽)
칼 맑스는 코뮤니즘의 사회정치적인 근본 원리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으로 정식화하였다.그가 이 원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글은 파리 코뮨을 분석한 프랑스에서의 내전이다. 그런데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코뮤니즘이 자개자연으로 정식화되고 있다. “진정한 공동체에서 개인들은 서로의 연합 속에서 그리고 연합을 통해 그들의 자유를 획득한다. (…)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과 운동의 조건들을(물론 이는 오늘날 발전한 생산력을 전제로 한다) 통제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개인들의 연합체이다.” 칼 맑스는 이미 그가 코뮤니스트가 되었던 청년 시절부터 코뮤니즘을 자개자연으로 이해하고 있었다.(<이성백─중세 코뮨: 코뮤니즘의 역사적 기원>, 279쪽)
5. 엮은이의 말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말 그대로 인류의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에 변화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이윤 축적 중심의, 성장 중심의 생산을 변화시켜 탈성장 사회를 이루고, 계급과 젠더 불평등을 야기하는 경제구조를 변화시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운데, 대안적인 삶의 형식이 펼쳐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이 ‘코뮨’, 그리고 ‘코뮤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대안적인 사회 구조와 삶의 방식을 지칭한다.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 인간 사회가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그려왔던 청사진대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언어로, 어떤 이론적 전망을 통해 오늘날 필요한 ‘코뮨’을 사유할 것인가? -(<서문> 중에서,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