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의 한국 시에 대한 숱한 긍정적 기여와
몇몇 부정적 국면을 함께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쓰인
최현식 교수 평생의 미당 연구서
1. 이 책을 발행하며 / 2. 필자 소개 / 3. 차례 / 4. 본문에서 / 5. 저자의 말
1. 이 책을 발행하며
도서출판 b에서 최현식 교수(인하대 국어교육과)의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을 발간하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서정주라는 이름은 한국어의 토착적 아름다움을 한 차원 드높인 위대한 시인이라는 평가와 친일 행각 및 독재 정권에 순응하며 문단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기회주의자라는 양날의 평가가 언제나 동반되는 ‘불편한’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이 양면을 두루 아우르며 미당을 살피는 작업을 하는 일 역시 ‘불편한’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커다란 이름과는 맞지 않게 미당에 대한 작가론과 작품론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며 아예 제목까지도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으로 붙인 최현식 교수의 전면적인 미당 연구서/비평집은 그런 의미에서 ‘용기 있는’ 저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1장 「떠돌이ㆍ시의 이슬ㆍ천심天心―“난타하여 떠러지는” 서정주의 “종소리”」(2023)”는 서정주 초기 시에 출현하는 다양한 공간의 성격과 의미를 ‘진정한 장소성’의 추구와 비참한 ‘장소 상실’에 대한 반성을 중심으로 살펴본 비평문이다.
“제2장 「탕아의 편력과 귀환―독자와 함께 읽는 <화사집>」(2014)”은 대중 강연을 위해 마련한 글이다. 첫 시집 <화사집>의 의미를 ‘탕아’의 가출과 귀환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이에 따라 미당이 질풍노도의 시절 인연을 맺었던 다양한 인간 군상, 그가 들고 났던 식민지 근대성의 공간-장소에 대한 시적 표현과 가치화의 문제가 비평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제4장 「‘사실의 세기’를 건너는 방법―1940년 전후 서정주 산문과 릴케에의 대화」(2014)”는 전全 세계사적 파시즘의 도래에 따른 ‘사실의 세기’ 및 군국주의적 ‘총력전’의 전개가 미당 시에 미친 영향과 변화의 지점을 입체적으로 짚어본 글이다.
“제5장 「서정주와 만주」(2010)”는 1941년을 전후한 약 6개월의 만주 체험을 비극적 감흥으로 주조한 수 편의 ‘만주’ 시와 1980년을 전후한 말년의 만주 회고담, 곧 결코 잊힐 수 없는 만주의 생활과 문학적 분투기를 기록한 자전적 시와 산문들 사이에 엿보이는 유사성과 차이점의 낙차를 검토한 비평문이다.
“제6장 「서정주의 「만주일기滿洲日記」를 읽는 한 방법」(2014)”은 가족의 가난을 피하기 위한 구직 활동으로, 나아가 문학적 전기를 새롭게 마련하기 위한 미학적 모험으로 감행된 만주 생활의 고통과 불안의 면면, ‘만주양곡주식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수용된 미당의 ‘창씨명’과 입사 확정 순간의 희열 등을 실감 나게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제7장 「내선일체ㆍ총력전ㆍ<국민시인>」(2020)”은 최재서의 추천에 따라 친일의 “조선문인협회”(이후 “조선문인보국회”) 기관지 <국민문학>과 <국민시인>에 근무했던 서정주의 경험과 내면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이다.
“제9장 「‘춘향’의 미학과 그 계보―서정주 시학의 경우」(2015)”는 서정주 중기 시를 대표하는 ‘춘향의 말 삼부작’ 「추천사」, 「다시 밝은 날에」, 「춘향 유문」의 정본화 과정을 추적한 글이다.
“제10장 「‘하눌의 살’, ‘신라의 이얘깃꾼’―서정주의 <자유공론> 소재 ‘한국의 탑ㆍ불상’ 시」(2015)”는 한국을 대표하는 절집의 탑과 불상을 노래한 미당의 시를 발굴, 소개한 글이다.
“제11장 「‘질마재’의 역사성과 장소성―산문과 자전自傳의 낙차」(2015)”은 <화사집>~<질마재 신화> 곳곳에 등장하며 서정주 시의 ‘미美’적 이념과 ‘영원성’의 조각에 큰 영향을 미친 실제적인 동시에 본원적인 고향인 ‘질마재’의 의미와 가치를 살펴본 글이다.
“제12장 「서정주ㆍ관광의 시선ㆍ타자의 점유―<서西으로 가는 달처럼…>과 <산시山詩>의 경우」(2022)”는 산업화 시대 들어 민족적ㆍ문화적 자긍심의 고양과 실천을 드높이기 위해 국가 시책의 일부로 권장되던 ‘세계 여행’에 대한 미당의 경험과 시적 표현의 의미 및 역할을 탐구한 글이다.
“제13장 「시적 자서전과 서정주 시 교육의 문제―<안 잊히는 일들>과 <팔할이 바람>의 경우」(2011)”는 1970년 전후 작성된 문학적 자서전을 시의 그것으로 치환하여 발표한 두 시집의 성격과 역할을 검토한 글이다.
최현식 교수는 27년전인 1997년 서정주를 직접 만나고, 2003년 「서정주와 영원성의 시학」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쓴 이래 현재까지 학술논문, 비평문, 에세이, 대중강연 등 다양한 형식을 빌어 꾸준히 서정주 문학에 대한 연구와 평가를 계속하고 있는 학자이다.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은 1996년의 논문부터 2023년의 비평까지를 아우르며 최현식 교수의 서정주 연구 발자취를 본인이 직접 선별한 글을 통해 되짚어보는 의미 있는 책으로, 좁게는 서정주라는 시인의 시와 인생역정에 관심 있는 연구자부터 넓게는 일제와 해방, 독재와 민주화로 이어지며 어찌 되었든 시를 통해 그 역사에 참여했던 한국 현대 시사詩史의 거대한 한 줄기를 들여다보고픈 독자에 이르기까지 공히 관심을 둘 만한 역작이다.
2. 필자 소개
■ 지은이 최현식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문학(현대시)을 전공했다.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다. 학부 시절 정지용과 김수영 시에 크게 매혹되었다. 대학원 시절 서정주 문학을 조우한 뒤 지금까지도 시인이 밟아간 근대성과 반근대성의 문제를 추적하고 있다. 요즘에는 일제시대 사진엽서, 만주 관련 문학, 해방 후 북한문학을 새로 읽는 재미에도 빠져들고 있다. 연구서로 <일제 사진엽서, 시와 이미지의 문화정치학>,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 <한국 근대시의 풍경과 내면>, <신화의 저편—한국현대시와 내셔널리즘>, <최남선ㆍ근대시가ㆍ네이션>등을, 평론집으로 <말 속의 침묵>, <시를 넘어가는 시의 즐거움>, <시는 매일매일>, <감응의 시학> 등을 출간했다.
3. 차례
ㅣ책머리에ㅣ 5
제1장 떠돌이ㆍ시의 이슬ㆍ천심 15
제2장 탕아의 편력과 귀환 35
제3장 서정주 초기 시의 미적 특성에 대하여 59
제4장 ‘사실의 세기’를 건너는 방법 85
제5장 서정주와 만주 121
제6장 서정주의 「만주일기」를 읽는 한 방법 139
제7장 내선일체ㆍ총력전ㆍ<국민시인> 179
제8장 민족과 전통, 그리고 미 203
제9장 서정주 시에서 ‘춘향’의 미학과 그 계보 225
제10장 ‘하눌의 살’, ‘신라의 이얘깃꾼’ 259
제11장 ‘질마재 신화’의 역사성과 장소성 283
제12장 서정주ㆍ관광의 시선ㆍ타자의 점유 319
제13장 서정주와 시적 자서전의 문제 361
ㅣ발표지 알림ㅣ 387
4. 본문에서
“미당은 그 ‘허무 의식’의 이면에 극단적인 니힐리즘의 선배 도스토옙스키가 내렸던 처방전인 “유아의 미소”를 이미 감춰두고 있었다. 아무려나 그것은 기성의 ‘조선적인 것’과 결별할 수 있는 예외적이며 탁월한 ‘조선적인 것’을 시의 내용과 형식, 이념과 사상으로 추구하는 작업에서 가장 윤리적이고 심미적인 선택지였다. 시를 통해 결핍과 패퇴투성이의 식민지 현실을 구원하고 다시 구성할 때 필요한 최적의 명분으로 그 무엇이 “유아의 미소”를 능가하겠는가. 다소간 자조 섞인 고백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의지 한 자락을 “시는? 시는 언제나 나의뒷방에서 살고 잇겟지 비밀히이건 나의 영원의처妻이니ᄭᅡ”라고 일기에 적을 수 있던 까닭도 저 “유아의 미소”를 어떻게라도 벌써 조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장)
“사실 이런 현실의 포기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열망은 1938년 10월 <사해공론四海公論>에 발표된 「바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는, 시작 과정에서 얻어졌을 삶의 본질에 대한 명민한 의식은, 자아로 하여금 애비, 어미, 형제, 친척, 동모, 아내마저도 잊고서 알래스카, 아프리카 등으로 상징되는 ‘지금ㆍ여기’가 아닌 곳을 갈망하게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밤과 피에 젖은 국토”에 대해 “사랑하는 눈을 뜨라”고 할 정도의 ‘불행한 의식’을 여전히 견지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풀밭에 누어서」에서처럼, 세계와 주체에 대한 균형감각을 상실한 자아는, 그런 현실을 초월할 새로운 가치와 세계에 대한 창조의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환멸 의식만을 내면화하게 된다.” (3장)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는 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절박한 미적 투지, 다시 말해 사회적ㆍ미학적 거세의 공포에 맞선 자기 보호의 전략적 언술로 이해될 여지가 충분하다. 동일한 경험의 지속적 반복 및 자기 처지에 합당한 형태로의 변형은 미당 자신에게만 유익한 행위가 아니었다. 이른바 ‘자전적 시’라는 장르적 특수성은, 필립 르죈을 말을 빌린다면, 시인이 제안하는 방식의 책 읽기를 유인하며 또 그것이 유포하는 믿음을 효과적으로 구조화한다. 요컨대 미당의 자전적 시편과 시집들에도 질마재 신화에 가득한 이야기꾼의 뛰어난 감각과 대중 장악력이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고백은 사실성과 진정성을 동시에 강화하여 나가는 것이다.” (5장)
“서정주도 대체로 최재서의 의견에 동조하며, “조선에의 애정”에 열정적이었던 사토의 전체 시편에 대한 따뜻하며 감동적인 독후감을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한쪽으로 편벽되지 않는다는 것, 또 시단의 일반적 풍조를 추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매력적인 요소로 삼으며, 벽령집과 내선의 율동은 물론이고 전쟁 시편조차 “필연적인 생명의 흘러 넘침流露”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상찬했다. 또한 미당은 조선 토속어의 시어화詩語化에 누구보다 예민했던 시인답게 사토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를 일본어의 ‘심미적 근대성’ 추구에서 찾았다. 현재 사용하는 언어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일본의 현재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높이 끌어올리는 데 열심히 노력한” 대표적인 시인이 사토였다는 것이다.” (7장)
“감히 말하건대, 미당의 세계 기행은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그것도 지저분한 소련행 여객기 화장실에서 먼저 만나는 것으로 완결되었다. 미당은 ‘시의 이슬’이 가야 할 심미적이거나 윤리적인 궤적과 과녁을 제일 먼저 알려준 시적 영향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시적 불안도 두 선배 문인에게 거의 처음 배웠다. 더군다나 그들은 세계 문학의 성좌에 높이 오른 모습이 아니라, 그저 그런 일상생활에서조차 추방된 가장 비참하며 굴욕적인 모습으로 문득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 소설의 주인공 이름에 새겨진 ‘죄’와 ‘벌’, ‘매음’과 ‘유형’이야말로 미당 자신에게는 인간의 본원적 비극성을 아프게 알려주는 한편 그것을 초월할 ‘동양적 영원성’을 계속하여 추구하게 만든 사상과 감정의 원점이었다.” (12장)
5. 저자의 말
“살아생전의 미당 서정주 시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온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니 어언 27년 전인 1997년 한여름이었다. 당시 갓 창간된 <한국문학평론>의 주간이었던 평론가 임헌영 선생과 함께 사당 남현동 자택을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들었다. 나는 그때 이 계간지에 1933년~1955년 사이 작성되었으나 시대 탓이든 개인의 판단 탓이든 미당의 어떤 문집에서도 실리지 못한 시 37편과 산문 6편에 대한 소개와 해석의 글을 실었던 차였다. 고작 스물예닐곱의 나이에, 여든셋의 성상星霜을 헤아리던 문제적이며 예외적인 시혼詩魂을 처음 대면하는 기쁨과 경외감은 정말 대단했다. 영향에 대한 불안과 초극의 욕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는 선배 문인 정지용과 임화에 대한 미당의 회상은 1930년대 중반 언저리로 나를 몰아갔다. 남북분단 이후 다시는 눈에 넣을 수도, 입에 붙일 수도 없게 된 시우詩友 이용악과 오장환에 대한 그리움은 선생의 눈시울 말고도 나의 그것을 붉히기에 충분했다. 미당의 생생한 목소리와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 듣던 옛 순간을 떠올리자니 지금 당장 몸과 마음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그런 뒤 작은 학술 논문들과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며 내 나름의 ‘미당론’을 건축해 가다가 2000년 12월 24일 교환 학생 차 건너가 있었던 일본 도쿄의 어느 낯선 연구실에서 굴곡 많은 미당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결국 2003년 2월 제출된 박사 학위 논문 「서정주와 영원성의 시학」, 그리고 이것에 몇 편의 학술 논문과 비평문을 합해 출간한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소명출판, 2003)는 미당 선생의 손에 잠시라도 얹힐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채 나의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료와 주제는 확보되고 결정된 상태였으나 당시 미처 쓰이지 못했거나 미진한 채로 남아 있던 요목要目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당 선생을 향한 나의 관심과 대화의 욕망을 끊임없이 충동질했다.
2004년 이후 그렇게 작성된 비평문과 학술 논문이 15편여에 달하게 되었다. 그것들을 쭉 펼쳐놓자니 1930년대~1993년 사이에 쓰인 미당의 시 생애 전반에 걸친 시(집)와 산문(집)에 대한 소견과 해석이 얼추 매듭지어진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글들의 시대성과 입체성을 살려 미당 서정주의 시사詩史를 구성해 보자는 욕망이 싹트고 자라났다.
(…)
숱한 고심 끝에서야 이 책의 제목을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으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13편의 글에 대한 안내가 얼마간 길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각각의 글에서 다룬 시와 산문, 주제와 담론들은 고비마다의 한국 현대 시에 대해 만만찮은 파장과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한 텍스트들이었다. 나의 경우로 한정하여 말한다면, 나는 미당 시를 공부하며 한국 근현대 시의 근대성과 반대근성의 세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분석하는 고통스러운 행운(?)을 누려왔다. 아무려나 책의 제목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은 미당의 한국 시에 대한 숱한 긍정적 기여와 몇몇 부정적 국면을 함께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또 미당 연구자이자 비평가인 나에 대한 선한 영향과 준엄한 계고를 잊지 않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책머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