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벤야민, 라캉, 들뢰즈, 카네티를 매료시킨
한 신경병자의 날 것 그대로의 육성’
1. 이 책을 발행하며
도서출판 b의 야심찬 고전 시리즈 ‘b판 고전’의 26번째 책으로 다니엘 파울 슈레버의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이 김남시(이화여대)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은 제목이 말해주듯 역사상 처음으로 신경병자가 자신의 증상과 치료 과정 전반을 세세히 기록하여 출간한 책이라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이는 저자 슈레버가 판사 출신의 지식인이었으며, 정신병원에서 나가고 싶은 소망을 법률적으로 의미 있는 문건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항소이유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가능했다. 나아가 슈레버는 자신의 신경병을 밝힘으로써 얻게 될 개인적 수치보다는 자신의 자세한 신경병적 망상의 기록이 학문과 종교적 진리 인식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에 더 주목했다. ‘서설’에서 슈레버는 이렇게 말한다. “출판을 막고 나서는 주변의 우려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생존한 사람들을 고려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내 육체와 개인적 운명에 대해 전문가의 관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학문과 종교적 진리 인식에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을 생각하면 모든 사적인 고려들은 침묵해야만 한다.”(9쪽) 루소의 <고백> 같은 모든 위대한 회상록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자기 자신의 수치마저도 드러낼 수 있는 위대한 용기에 의해서 탄생하였다.
이 책은 1903년 라이프치히의 오스발트 뭇제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나 거의 묻혔다가 1911년 프로이트의 논문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여러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쳐왔다. 편집증적 망상체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하는가를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전하고 있는 이 회상록은, 접근하기 어려웠던 환각과 망상체계의 내적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고전 정신의학자들은 물론, 프로이트 이후 멜라니 클라인이나 라캉 등의 정신분석자들에게 이 책이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영향력은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은 망상이라는 형태로 변형된, 20세기 초 한 유산시민 계급의 의식과 무의식을 규정했던 사회ㆍ정치ㆍ역사ㆍ문화적 상황들을 보여주는 중요한 도큐멘트이자, 자신을 엄습하는 정신적ㆍ육체적―현실적이면서도 상상적인― 고통에 맞서 싸운 한 개인의 생생한 인간 드라마일 뿐 아니라,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한 발터 벤야민 같은 독서가도 “그 즉시 최고로 매료”될 만한 깊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이 회상록이 소설은 물론 비디오아트,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것은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문학적 성격 때문이다. 한국에서 슈레버는 프로이트와 라캉, 들뢰즈 등의 논의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어 왔다. 하지만 정작 중심 대상이 되었어야 할 슈레버의 회상록은, 뚜렷한 입장들을 갖고 있는 이 이론가들의 관점에 의해 선별되고 취사된 형태로만 전해져왔다. 이제 이 완역판 회상록을 통해 독자들은 이들의 시각으로 걸러지지 않은 슈레버 박사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 필자 소개
■ 지은이 다니엘 파울 슈레버(1842~1911)
1842년 독일 라이프치히 출생. 독일 드레스덴 고등법원 판사회의 의장을 역임할 정도의 엘리트였으나, 정신병(강박증)에 걸려 두 차례 치료소에 입원했다. 신이 어떤 음모로 자신을 공격하고 여성화해서 임신시키려 한다고 생각하거나, 음식을 흘리거나 말을 더듬거나 잠을 못 자는 까닭이 신의 계획이라고 주장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는데, 이는 부친인 모리츠 슈레버의 영향이 크다. 오늘날 정신의학, 정신분석뿐 아니라 현대문학과 철학 이론,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프로이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옮긴이 김남시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서 미학/문화이론을 가르친다. 발터 벤야민, 프리드리히 키틀러, 아비 바르부르크,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보리스 그로이스 등 독일어권 저자들의 책을 번역하였다.
3. 차 례
서설 7
플레히지히 교수께 보내는 공개서한 13
서문 21
1장 신과 불사 27
2장 신의 왕국의 위기? 영혼 살해 45
3장 57
4장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신경병이 출현했던 시기의 개인적 체험들 59
5장 계속. 신경언어(내적인 목소리). 사유 강제. 세계 질서의 요구라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탈남성화 73
6장 개인적 체험 계속. 비전. ‘영령을 보는 자’ 91
7장 개인적 체험들, 계속. 특이한 증상들. 비전 111
8장 피에르존 박사의 요양소에 체류하던 동안의 개인적 체험들. 검증된 영혼들 129
9장 존넨슈타인으로의 이송. 광선과의 교통에서 일어난 변화들. ‘기록 시스템’, ‘대지에 붙들어 매다’ 151
10장 존넨슈타인에서의 개인적 체험들. 광선 접촉의 부속 현상으로서의 훼방. 기분 조작 169
11장 기적을 통한 육체적 통합의 훼손 183
12장 목소리가 하는 말의 내용. ‘영혼의 이해’. 영혼 언어. 개인적 체험의 연속 199
13장 흡인력의 요소로서의 영혼 쾌락. 그로부터 생겨난 현상들 215
14장 ‘검증된 영혼들’, 그들의 운명, 개인적 체험, 계속 231
15장 ‘인간 놀음’과 ‘기적 놀음’. 도와달라는 외침. 말하는 새 243
16장 사유 강제. 그 형태와 부수 현상 259
17장 계속. 영혼 언어의 의미에서의 ‘그리기’ 273
18장 신과 창조 과정. 자연발생, 기적을 통해 생겨난 곤충들. 시선 이동. 시험 체계 285
19장 앞 장의 계속. 신의 전능과 인간 의지의 자유 299
20장 나 개인과 관련된 광선들의 자기중심적 이해. 개인적 관계들의 진전 양상 311
21장 축복과 쾌락 사이의 관계.이것이 개인 행동에 미치는 결과 323
22장 결론적 고찰. 미래에 대한 전망 337
후기
1차 후기: 1900년 10월에서 1901년 6월까지 349
2차 후기: 1902년 10월과 11월 395
부록
“정신병이 있다고 여겨지는 개인을 그가 표명한 의지에 반해 정신병원에 감금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409
A. 베버 박사의 1차 감정서. 법의학 감정서 423
B. 베버 박사의 2차 감정서. 주 정신병원 의사의 감정서 435
C. 항소이유서 449
D. 1902년 4월 5일 추밀고문관 베버 박사의 감정서(3차 감정서) 499
E. 1902년 6월 14일 드레스덴 왕립고등법원 판결문 521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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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문에서
다시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 그리고 아내와 함께 집에서 살기 위해 조만간 이 정신병원에서 퇴원할 것을 결심한 이상, 내 주위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최소한 나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대략이나마 알려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는 그것을 통해―비록 완전하게는 아닐지라도―나의 행동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이상한 점들을 그들이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최소한 나로 하여금 그런 이상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어떤 필연성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21쪽)
이후 일어난 일들에 근거하여, 나는 내 신경병이 치료되기 힘든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 누군가가 나에 대해 영혼 살해를 시도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영혼 살해가 일어난 후, ‘식욕은 식사를 함으로써 생겨난다’는 원리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도 영혼 살해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저 첫 번째 영혼 살해가 진정 한 인간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답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명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들이 서로 질투해서 시작된 싸움이 그 발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47쪽)
내 삶에서 중요한 국면이라 일컬을 만한 또 한 번의 신경 몰락은 1894년 2월 15일경에 일어났다. 그때까지 매일 몇 시간씩 나와 함께 있었고 또 점심식사도 정신병원에서 함께 하던 아내가 나흘 일정으로 베를린에 있는 그녀 아버지에게 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 나흘 동안 내 상태는 너무도 악화되어서, 나는 아내가 돌아온 뒤 단 한 번 그녀를 만나고는 그런 끔찍한 상태에 있는 내 모습을 그녀가 계속 보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 시기부터 아내의 방문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간혹 건너편 방 창문에서 아내를 보았을 때는, 이미 내 주위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변화들이 생겨난 터라, 나는 아내에게서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다만 ‘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들’과 같은 방식으로 기적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 형상을 보았다 믿었다. 나의 정신적 붕괴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하룻밤 동안 범상치 않을 만큼 많은 몽정(아마도 대여섯 번)을 했던 어느 날 밤이었다.(70쪽)
그런 이유로, 대량으로 내 몸속에 들어온 여성 신경 혹은 쾌락신경들은 일 년이 넘도록 내 태도와 사고방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그 신경들이 자극될 때마다 나는 내 남성적 명예를 동원해서, 나를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종교적 생각들의 성스러움을 통해 그것들을 억압했다. 따라서 내 몸에 여성 신경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불안감에 몸을 떠는 여자 같은 인간으로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광선이 그 신경을 갑자기 자극해서 일부러 요동시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의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내 의지력으로 침대에 누울 때 내 몸에 쾌락감이 생겨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163~164쪽)
그런데 환자는 현재 자신의 ‘회상록’을 (여기 첨부된 그대로) 출판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는 강한 바람을 내세우고 있으며, 그를 위해 출판사와 협상 중에 있습니다(당연하게도 지금까지는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에 실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 우려스럽고 미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무절제한 상황과 사건의 묘사, 외설적 표현 등을 고려하면, 평상시엔 분별력 있고 세심한 한 남자가 자기 명예를 공공연히 훼손할 만한 행위를 하려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의 세계관이 병적으로 왜곡되어 있고 현실에 대한 시각이 부재하며, 병적 상태에서 기인한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한계에 대한 그의 인식을 흐리게 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베버 박사의 2차 감정서’, 447쪽)
5. 옮긴이의 말
좋은 번역이라면 모름지기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함께 옮겨야 한다면, 영어 번역자들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어 번역에도 해당된다. 이 번역은 타협의 산물이다. 슈레버의 증상적 문장을 되도록 그대로 전하려던 처음의 시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국어 문장의 끔찍한 비가독성 앞에서 좌절했다. 오랜 고심 끝에 번역문의 가독성을 위해 언어적 징후들을 치유하는 길을 택했다. 긴 문장은 짧게 나누고, 어색한 수동문은 능동으로 바꾸었다. 옮긴이 주석을 통해 독일어 원문에 있는 중요한 언어적 요소들의 의미를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슈레버 독일어의 낯선 증상은 어쩔 수 없이 치료되어 번역되었다. 그 결과물인 이 번역에서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낯선 언어들을 만날 것이다. 그것은 슈레버의 언어적 증상의 흔적일 수도, 번역자의 부족한 능력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한국의 독자들도 드디어 슈레버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 모든 부끄러움을 감수하게 한다.” (‘옮긴이 해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