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을 겪는 인간의 휘어진 삶과 선택,
이 책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들을 향한 작은 헌사다.”
1. 이 책을 발행하며 / 2. 지은이 소개 / 3. 차례 / 4. 본문에서 / 5. 지은이의 말
1. 이 책을 발행하며
도서출판 b에서 이정현 문학평론가의 <무너진 세계에서 꿈꾸기: 전쟁, 인간 그리고 예술>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큰 전쟁인 제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의 상황, 혹은 파국의 상황 속에서 살아간 ‘인간’들의 크고 작은 선택들과 그 결과를 문학, 미술, 영화, 사진 등 다양한 ‘예술’ 작품과의 연관성 속에서 짚어보는 책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국방일보>의 ‘전쟁과 인간’ 코너에 연재한 글 가운데 엄선한 글들을 모았다.
글쓴이가 바라보는 전쟁은 단순히 어떤 역사적 사실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당대를 살던 인간에게 실존적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 그 자체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딜레마를 통과하다 보면 그 안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민낯이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 기꺼이 양심을 버리고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자들,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들, 자신의 과오를 끝내 모른 채 생을 마감하는 자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방관한 자들이 생겨나며, 이들은 모두 전쟁 이전에는 우리 옆에서 이웃으로 살던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다. 누군가는 국가와 집단의 정당성을 해친다는 명분 아래 공식적인 기록과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망가진 세계에서도 마지막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스러져갔다. 이 여러 선택과 결과들을 지은이는 ‘무너진 자들’, ‘통과한 자들’, ‘누락된 자들’, 그리고 ‘꿈꾸는 자들’의 범주로 묶었고, 그 네 가지 인간의 모습들에 해당하는 인간과 예술을 명징하고 가독성 있는, 그러나 힘 있는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
문학평론가이면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개인적으로는 ‘전쟁 덕후’이기도 해서, 그동안 전쟁에 관련한 수많은 자료들을 탐독해왔다. 저자의 첫 책 역시 한국전쟁을 다룬 외국문학에 대한 비평서인 한국전쟁과 타자의 텍스트였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저자는 문학과 전쟁과 예술에 대한 그동안의 지식과 성찰을 끌어모아 이 글 전체에 쏟아부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낯익은 이름들도(히틀러, 괴벨스,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헤밍웨이, 카뮈, 로맹 가리, 로버트 카파, 안정효 등) 있지만, 낯설고 처음인 이름들이 훨씬 많다. 유제프 차프스키, 카렐 차페크, 게일 할보르센, 타냐 크라스냔스키, 바오닌, 엔도 슈우사꾸, 잉그리트 폰 욀하펜, 오노다 히로, 니콜라이 바빌로프 등에 대한 저자의 스토리텔링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아직 전쟁을 많이 모르고 있음을 은연중에 깨닫게 된다. 독자들이 재미있게 이 글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인가 20세기의 전쟁들 속에 피었다 진 수많은 인물들의 에피소드와 그들이 남긴, 혹은 그들과 연관된 예술의 목록들이 머리에 남게 될 것이다. 각각의 글들을 읽으며 흥미가 생겨났을 때 다시 그 인물과 예술에 관한 책과 영화와 작품들을 찾아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자체로 20세기 전쟁사에 대한 박물지 역할을 할 수 있음과 더불어 새로운 공부와 탐구의 방향을 세워주는 길잡이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속 인간의 선택에 대해 지은이가 방점을 찍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들, 즉 ‘꿈꾸는 자들’이다. 생활세계 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적 상황에서도 솔제니친은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했고,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의 범죄를 잊지 않으려 했고,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소년 시절을 고백했고, 그레이스 M. 조는 어머니의 삶을 복원하려 했다. 어쩌면 파국 속에서 인간은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찬란한 아이러니. 이 책이 발간되는 오늘, 45년 만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되며 정국이 혼란 상황 속에 있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도 이 아이러니는 다시 보인다.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이 사퇴를 거부하고 여당의 보이코트로 탄핵이 1차 좌절된 혼돈의 상황 속에서도 여의도를 점령한 시민들, 무엇보다 20-30 젊은이들이 ‘아파트’를 부르며 탄핵을 외치는 모습이야말로, 저자가 이 책에서 톺아냈던 ‘무너진 세계에서 꿈꾸는 자들’의 바로 그 모습이다. 이 책이 이 시기에 읽혀야만 할 이유다.
2. 저자 소개
■ 지은이 이정현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 문학을 전공했다. 「이청준 소설에 나타난 언어와 죽음 의식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었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전쟁을 다룬 외국 소설들을 분석한 비평서 <한국전쟁과 타자의 텍스트>가 있다. 그 외 <인간 신해철과 넥스트시티>(공저), <키워드로 읽는 2000년대 문학>(공저)이 있다. ‘전쟁(재난)과 인간’, ‘집단의 기억에서 누락된 자들의 목소리’, ‘냉전 시대의 갈등과 문화사’,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 ‘1990년대의 상처와 기억’이 주요 관심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비평과 정신분석 이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3. 차례
ㅣ프롤로그ㅣ 파국의 목전에서 엇갈린 사람들 9
⎯플로리안 일리스, <1913년 세기의 여름>
제Ⅰ부 무너진 자들
무너진 세계와 어느 지식인의 절망 17
⎯슈테판 츠바이크의 삶과 죽음
늙은 파우스트의 회고록 21
⎯알베르트 슈페어,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악마의 혀, 대중을 장악한 선동술의 대가 26
⎯히틀러의 대변인, 요제프 괴벨스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악의 민낯 31
⎯홀로코스트 재판과 철학적 사유
약물에 중독된 ‘환자 A’ 35
⎯노르만 올러,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차악’이 없는, 가혹한 선택 40
⎯블라소프 장군과 자유러시아군의 비극
구국의 영웅과 ‘콜라보라시옹’의 거리 45
⎯필리프 페탱
‘전후 일본’과 두 사람의 죽음 50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
나약한 육체와 인간의 불안 55
⎯에곤 실레의 삶과 예술
어떤 시대에는 무지도 죄가 된다 61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전쟁이 강요한 딜레마 65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선율에 담긴 시대의 고통 70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시대의 소음
전쟁의 비극과 너무 늦어버린 사과 74
⎯이언 매큐언, 속죄
아사한 식물학자 78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삶과 비극적 최후
제Ⅱ부 통과한 자들
70년 만에 진실을 밝힌 ‘스구로’ 85
⎯엔도오 슈우사꾸, 바다와 독약
과거는 앞에 있지만 미래는 등 뒤에 있다 89
⎯난징 대학살과 훗타 요시에의 소설 시간
살아남은 자의 슬픔 93
⎯망명한 독일의 지식인들
웃음과 광기의 대결 97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어른들의 세계에서 도피한 반항아 101
⎯J. D. 샐린저
‘잃어버린 세대’의 치열한 방황 106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과 문학
훼손된 육체와 죽음이 만든 시 110
⎯고트프리트 벤의 삶과 문학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115
⎯이창래, 척하는 삶
저항과 폭력의 변증법 119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역사적 아이러니
언어로 치른 전쟁 124
⎯한국전쟁과 프랑스 지식인들
유령과 함께 한 생애 128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
역사와 대면한 전범의 자식들 132
⎯타냐 크라스냔스키, 나치의 아이들
냉전과 베를린 137
⎯베를린 첩보전, ‘작전명 골드’
인간의 선과 악에 던진 물음표 141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
전후의 세계와 새로운 극예술 146
⎯부조리극의 탄생
다시 반복될 필연적인 비극 151
⎯팬데믹 아포칼립스와 인간
애도하는 자의 슬픈 순례 155
⎯9ㆍ11테러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제Ⅲ부 누락된 자들
어느 장교의 몸에 새겨진 전쟁의 비극 163
⎯하진, 전쟁 쓰레기
나치의 혈통관리 시스템: ‘레벤스보른 프로젝트’ 167
⎯잉그리트 폰 욀하펜,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참사, 은폐된 진실 172
⎯USS 인디애나폴리스함 사건과 진실 규명
덧없이 망가진 청춘 176
⎯태평양전쟁 최후의 일본군 ‘오노다 히로’
“행복한 사람은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은 과거만 있다” 181
⎯리처드 플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나치 과학자 확보 작전 186
⎯‘페이퍼클립’ 작전과 ‘오소아비아킴’ 작전
냉전의 시작, 사할린 전투 191
⎯하세가와 쓰요시, 종전의 설계자들
냉전의 아이러니, 어느 스파이의 사랑 196
⎯이언 매큐언, 스위트 투스
마이즈루 해변의 비극 200
⎯우키시마마루 사건
망명자의 사랑 205
⎯에리히 레마르크, 개선문
알제리 전쟁과 자유 프랑스의 민낯 210
⎯‘영광의 날들’과 ‘알제리 전쟁’
핵전쟁을 막은 스파이, 고르디옙스키 214
⎯벤 매킨타이어, 스파이와 배신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첩보작전 219
⎯민스미트 작전
‘오카무라 기요시’, ‘노금석’, ‘케네스 로우’ 224
⎯블레인 하든, 위대한 독재자와 전투기 조종사
이오지마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229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아버지의 깃발’
죽음의 해변에 내몰린 소년병들 234
⎯덴마크 지뢰 제거 실화 다룬 <랜드 오브 마인>
제Ⅳ부 꿈꾸는 자들
그가 투하한 것은 희망이었다 241
⎯게일 할보르센의 ‘사탕 폭격기’
“기억이 없다면 인간은 헐벗은 존재일 뿐이다” 246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전쟁의 기억과 일본 전후 세대의 무의식 251
⎯전후 일본과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도덕적인 러시아는 가능한가? 256
⎯솔제니친의 삶과 문학이 던진 질문
‘전후 정신’을 잃지 않은 영원한 청년 작가 261
⎯오에 겐자부로의 삶과 문학
인류의 위기를 예지한 작가 265
⎯카렐 차페크
상처받은 영혼의 글쓰기 270
⎯임레 케르테스의 ‘홀로코스트 4부작’
역사의 상처를 마주한 작가의 용기 275
⎯귄터 그라스, 게걸음으로
사랑과 믿음의 힘 279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영원한 반항인의 삶 284
⎯알베르 카뮈
언젠가 사실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 288
⎯광기와 지성의 SF 대가 필립 K. 딕의 텍스트들
카파이즘, 진실을 기록하려는 신념 293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의 삶
암울한 전후 시대와 ‘헐리우드 키드’ 298
⎯소설가 안정효의 인물들
엄마 ‘군자’의 잃어버린 명예 303
⎯그레이스 M. 조, 전쟁 같은 맛
ㅣ에필로그ㅣ “인간은 자신이 살아갈 시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308
4. 본문에서
“슈페어는 슈판다우 감옥에서 끊임없이 걸었다. 그가 걸은 거리는 무려 31,939km에 달했다. 슈페어는 자신의 걸음 수를 기록하면서 고독한 시간을 견뎠다. 끝없이 걸으면서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슈페어의 회고록은 나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 기록이자 전쟁에 휘말려 삶을 잃어버린 한 청년이 비망록이다. 그가 남긴 글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늙은 파우스트의 독백처럼 읽힌다.” (「늙은 파우스트의 회고록」)
“메스암페타민은 필로폰의 주원료로 중독성과 부작용이 심각해 오늘날 대표적인 금지 약물로 규정된 물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방군은 제약업체에 페르비틴 3천5백만 정을 주문했다. 제약업체는 공장을 24시간 가동해 하루 80만 정이 넘는 페르비틴을 생산했다. 전쟁 초기 프랑스 침공 작전의 성공 여부는 신속한 진격에 달려 있었다. 독일 국방군은 전투 직전 병사들에게 페르비틴을 복용시켰다. 페르비틴의 각성 효과는 36시간 이상 유지됐다. 각성 효과에 힘입어 독일군은 일반적인 통념을 뛰어넘는 속도로 진격할 수 있었다.”(「약물에 중독된 ‘환자 A’」)
“사람들은 1948년과 1970년에 벌어진 두 사람의 자살을 완전히 상반된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자살은 그리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의 자살은 전후 일본을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다. 다자이 오사무는 전후의 현실에 회의를 품으며 스스로 망가지는 타락으로 대응했다. 반면 미시마 유키오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시대착오적인 군국주의와 천황주의를 신봉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두 사람의 죽음은 자신의 나약한 내면을 감추려 한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다자이는 과거(역사)를 외면하고 개인의 삶에만 몰두했다. 그를 비판하던 미시마는 이미 몰락한 허상에 자신을 이입하여 자긍심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토록 다르면서도 비슷했던 두 사람의 죽음은 전후 일본의 일그러진 내면을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전후 일본’과 두 사람의 죽음」)
“전 세계에 팬데믹의 공포를 알린 작가 팡팡은 현재 중국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고 있다, 팡팡의 기록을 담은 책 우한일기(2020)는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중국 버전이다. 소설 페스트의 말미에는 전염병의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환희가 묘사된다. 봉쇄된 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전염병이 사라지자 환희에 휩싸여 축배를 든다. 그러나 전염병이 창궐하던 내내 환자들을 돌본 의사 리외는 그 환희의 풍경을 보면서 전염병은 반드시 되풀이될 것이라고 말한다. 백신과 치료제의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우리도 머지않아 과거의 일상을 되찾게 되었음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앞으로 더 치명적인 팬데믹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백신 확보를 둘러싸고 선진국들이 보인 극도로 이기적인 행태는 더 격렬하고 비극적일 ‘코로나 이후의 재난’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예고되지 않은 비극은 없다.”(「다시 반복될 필연적인 비극」)
“2021년 프랑스 감독 아서 하라리는 오노다가 쓴 회고록 항복은 없다: 나의 30년 전쟁을 바탕으로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칸 국제 영화제에 초청받았으며 프랑스 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작품상,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각본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오노다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감독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완전히 갇혀버린 한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일본은 패전 후 완벽한 친미 국가로 돌변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특수를 발판으로 달러의 단맛에 빠졌다. 청년들을 소모품 취급했던 일본 정부는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오노다의 투쟁은 마조히스트의 우스꽝스러운 고집에 불과했다. 영웅적인 저항이라는 미명 아래 한 청년의 청춘은 그렇게 덧없이 무너졌다.”(「덧없이 망가진 청춘」)
“인간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에는 ‘상상’과 ‘습관’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할 때 인간은 무심하고 잔혹해진다. 그는 ‘쓰는 습관’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좌우명을 획득했다. 그 좌우명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대사다. 허클베리 핀은 도망친 노예인 친구를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외친다. “지옥은 내가 간다.” 오에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늘 이 말을 떠올리며 더 고된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오에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히카리는 장애를 딛고 작곡가로 성장했다. ‘인간은 회복하는 존재’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오에 겐자부로를 읽는다.”(「‘전후 정신’을 잃지 않은 영원한 청년 작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터미네이터>(1984)는 자원을 낭비하고 서로 갈등만 일삼는 인간들을 쓸모없다고 판단한 ‘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암울한 미래를 다룬 영화다. 그러나 디스토피아 서사의 고전이 된 이 영화의 상상력은 감독의 독보적인 전유물이 아니다. 영화의 저변에 깔린 상상력은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가 카렐 차페크(1890~1938)에게 빚지고 있다. 카렐 차페크는 최초로 ‘로봇’이라는 말을 사용한 작가였다. ‘로봇’은 체코어로 ‘노동’을 뜻하는 단어 ‘robota’에서 비롯됐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를 그린 차페크의 작품들은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창작됐다.”(「인류의 위기를 예지한 작가」)
“엄마는 불굴의 의지로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군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 주고 미국 음식을 익히며 인심을 얻었다. 전쟁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군자는 딸이 미국에서 훌륭한 학자로 성장하길 바랐다. 군자의 바람대로 그레이스는 명문 브라운대에 진학했다. 그레이스가 열다섯 살이 된 1986년 무렵부터 군자는 주변인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해치려 한다는 강박증이 생겼다. 군자는 집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면서 세상과 스스로 단절했다. 대학 생활과 사업 등으로 바쁜 가족들은 군자를 방치했다. 1990년대에 군자는 공식적으로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레이스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어머니가 기지촌 여성으로 일하다가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의 과거와 사회적 죽음에 부채감을 느꼈다. (…) 엄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살지 않았던 시대의 고통을 ‘맛’으로 통감한다. “자, 김치 더 무라. 그레이스야, 우린 생존자야. 너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어.” 저술을 마친 그레이스는 확신한다. 엄마는 ‘타락한 여자’나 ‘정신병자’가 아니라 전쟁과 가난, 폭력과 차별을 이겨낸 강인한 여성이었다고.”(「엄마 ‘군자’의 잃어버린 명예」)
5. 지은이의 말
전쟁을 경험한 자들과 우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전쟁을 직접 겪으면 깨닫게 되리라는 조언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자명하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갈 시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만약 전쟁이 없는 시대를 살았더라면,
그레이스 M. 조의 어머니 ‘군자’는 기지촌을 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명 높은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는 시골의 양계장에서 닭을 기르며 늙어갔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수백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대이동이 없었다면 스페인 독감의 전파력은 다소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에곤 실레는 조금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고트프리트 벤 역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모두 군의관으로 참전하는 곤혹스러운 삶을 살지 않았으리라. 뉴욕 거리를 헤매던 브레히트는 슬픈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난징에 파병되지 않았으므로 하루키의 소설은 덜 우울했을 것이다. 당신과 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저성장과 혐오의 시대, 심각한 기후 변화의 시대에 살아가기를 스스로 선택한 자는 없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외설의 산물이자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자각할수록 그들의 선택과 고통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지금 세계는 다시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가자 지구에서도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대만해협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지난해 9·19 군사 협정이 파기됐다. 어느 때보다도 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시기에 전쟁을 겪은 자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사이의 믿음을 파괴한다. 무수한 전쟁을 겪은 인류의 역사가 그 증거다. 그래서 전쟁을 논할 때면 자연스럽게 과거로 눈을 돌리게 된다.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 학살과 파괴의 풍경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전쟁을 뉴스와 게임처럼 소비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결핍에 채우고자 이미지의 생산과 소진을 반복한다. 기억과 서사가 데이터로 전락한 시대에 전쟁이라는 비극을 통과한 자들의 삶과 텍스트는 고통을 사유하는 법을 알려준다.
(‘옮긴이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