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해방적 대항 정치를 만들어 가야 할 근본적 이유를 찾는다”
1. 이 책을 발행하며
이 책은 젊은 정치철학자 한상원 교수(충북대)가 지난 2018년 이후 쓴 정치철학적 주제들의 논문 모음집이다. 각 글은 서로 다른 주제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각 글 사이에 일정한 역할 분담과 주제 배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실린 모든 글은 서로 다른 주제들과 방향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 강조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낳은 귀결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결여’가 낳은 귀결이라는 지적이다.
많은 학자들이 지금의 시기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정의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그러한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위기의 대안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에서 민주적 요소를 ‘축소’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다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위기에 대한 진단 속에서 그 처방으로 탈정치적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경향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주류적인 의견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우익 포퓰리즘이나 권위주의 정치세력의 부흥, 반지성주의나 혐오 정서의 확산 등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절차적 합의와 전문가 결정으로 환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서는, 민주주의의 민주적 요소들이 계속해서 축소되어 온 것이 바로 지금의 민주주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쉽게 간과된다.
오늘날의 위기는 민주주의가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탈정치화, 탈민주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지금의 위기가 다름 아닌 정치적 주체의 공백으로 인한 위기, 즉 주체의 위기, 주체성의 위기라는 사실이다. 점차 유권자들을 소비자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대우하는 기성 정치세력의 관점 속에서는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데모스demos의 권력kratos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데모스 혹은 인민은 집권 세력의 시혜에 의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발명하며, 요청하고, 심지어 그것의 실현을 강제하는 집단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이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집합적 주체를 요청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는 사회 제도도 아니고 국가 질서의 일부를 이루는 체제의 이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고대 아테네의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제도화된 질서나 체제의 관념과 함께, 그러한 체제를 구성해 내고 동시에 변혁하기도 하는 주체의 참여라는 관점에서 사유 되어왔다. 민주주의 정치는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이 집단적으로 수행되는 정치적 행위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회의 주권자로 거듭나는 주체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정치를 사회적 지배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주권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정치에 고유한 역동성은 그러한 연합이 실행되기 위한 주체화 속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오로지 유권자로서의 정체성만 남은 다수 대중은 그러한 주체가 될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현대 정치는 점차 주체를 배제하는 민주주의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사회를 운영하는 집권 세력들은 그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떠나 시장의 사적 권력을 강화하고, 기업의 이윤 추구의 권리가 사회의 공적 이익과 다수의 관심을 넘어 전 사회를 초월하는 불가침의 영역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그 결과 불평등과 불안정으로 인해 예속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프레카리아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져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경제적으로 배제된 자들이 정치적인 주체가 될 권리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원자화된 개인들의 고립된 삶은 이러한 이중적인 배제에 직면하여 무기력과 좌절에 내몰리고 있다.
이 순간, 누군가 이 배제된 자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집합적 주체성에 이름을 부여한다. 고립과 배제에 시달려야 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을 집단적 주체성으로 호명하는 이 힘에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우익 포퓰리즘 운동이 미국과 유럽에서, 또 한국과 동아시아에서도 폭발적인 힘으로 표출된 이유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주범이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이 등장했고, 누구나 포퓰리즘을 쉽게 비난하게 되었다.
오늘날 목격되고 있는 것은 ‘포퓰리즘 비판’이라는 담론 지형이 민주주의의 탈정치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오늘날 누군가 포퓰리즘 운동의 한계를, 특히 우익 포퓰리즘 운동의 파괴적인 성격을 강하게 비판하고 싶다면, 그는 그 이전에 그러한 포퓰리즘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민주주의 그 자체가 탈주체화, 탈정치화, 나아가 탈민주화되는 이 상황을 먼저 고발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민주주의를 ‘민주적’ 방식으로 확장하려는 기획의 일부로 이해한다. 앞서 소개된, 오늘날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민주주의의 ‘과잉’인가 민주주의의 ‘결여’인가 하는 물음은 여기서 결정적이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인민주권의 민주적 원리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민주적 주체성을 사유하기 위한 시론이다.
2. 지은이 소개
■ 한상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에서 맑스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 개념 연구로 석사 학위를,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아도르노의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 <공동체의 이론들>,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역사와 자유의식: 헤겔과 맑스의 자유의 변증법> 등이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의식하에서 비판이론을 비롯한 현대사회, 정치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3. 차례
ㅣ책머리에ㅣ 8
서문: 민주주의의 위기, 주체의 위기 11
제I부 인민의 이름으로: 포퓰리즘의 시대
제1장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19
제2장 포퓰리즘, 데모스, 급진 민주주의: 라클라우와 무페의 ‘인민’ 담론 구성에 관하여 59
제3장 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101
제II부 인권의 정치와 시민권의 정치: 퇴행에 저항하기
제1장 반지성주의와 위기의 민주주의: 탈진실 정치와 민주적 집단지성 139
제2장 혐오 발언 규제 논쟁과 인권의 정치 169
제3장 인간과 시민의 ‘이데올로기적’ 권리선언?: 맑스,아렌트,발리바르 209
제III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제1장 맑스의 국제주의와 환대의 정치-윤리 251
제2장 세계시민주의의 자기반성: 부정변증법적 비판을 통한 고찰 285
제3장 국민국가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발리바르의 세계정치와 관국민적 시민권 319
ㅣ발표지면ㅣ 359
4. 지은이의 말
오늘날 혐오의 정치화와 그 거대한 대중적 동원력을 볼 때마다 이 현실에 좌절하다가도, 그에 맞서는 흐름이 기어이 어떻게든 터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정치는 늘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때로 우리에게 어떠한 감동을 주는 찰나의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지금시간Jetztzeit이다. 그러한 순간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성좌에 대한 기대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정치에 대한 권리를 민주주의의 핵심적 이해 방식이자 존재 이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결정과 집합적 자기 통치를 위한 정치의 권리 속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해방적 대항 정치를 만들어 가야 할 근본적 이유를 발견한다.
5. 본문 속에서
인민주권은 늘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인민’이라는 범주가 시장에서 경쟁하며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 골몰해 있는 경쟁하는 ‘개인’들로 해체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민은 숨죽이고 있고, 잠을 자고 있다. 그러나 인민이 출현하는 어떤 순간, 잠자던 집합적 행위자가 거리와 광장에 출현하는 어떤 순간은 ‘미완의’ 인민주권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순간이며, 일상이 정지하고 아래로부터의 예외가 출몰하는 순간이다. 주권이 소멸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 그럼에도 오히려 비밀리에 경제적 자기 보존의 원리 속에 자신을 합리화하며 자신의 주권을 만인에게 강요하는 자립화된 경제적 권력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오늘날, 정치는 그러한 출몰을, 곧 대항-주권으로서의 인민주권의 출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I부 1장.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56~57쪽)
그러나 동시에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포퓰리즘이 무조건적으로 추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내부에서 반지성주의와 권위주의가 자라나지 않기 위한 정치적 합리성에 대한 고민 또한 필요하다. 달리 말하자면, 포퓰리즘에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할 위험과, 민주주의를 재활성화시킬 가능성, 잠재력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중성은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포퓰리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I부 3장. 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134쪽)
반지성주의가 정치적 쟁점인 이유는 지성이 민주주의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앞서 예멘 난민 시위나 이대남 사례에서도 지적되었듯이, 그리고 팬데믹 시기의 낙인찍기 사례에서도 확인되었듯이, 공포나 불안이 만연해지는 사회적 위기의 상황은 상상적인 ‘적’으로 낙인찍힌 집단에 대한 ‘허위적 적대’를 출현시킨다. 그것이 허위적 적대인 이유는, 그러한 적대가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불만과 분노의 진정한 원인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고, 낙인찍힌 집단에 대한 공격적 충동의 투사를 통해 분노를 배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허위적’ 분노의 방향성으로 인해 적대의 원인이 되는 구조적 본질은 은폐된다. 따라서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사회의 자기 내 모순에 대한 인식과 자기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II부 1장. 반지성주의와 위기의 민주주의, 166~167쪽)
오늘날 타자에 대한 혐오가 널리 확산되고 차별이 일상화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차별을 철폐하기 어려운 이유의 하나는 차별이 많은 경우 무의식적이며 비의도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흔히 ‘차별은 없다’라고 착각하거나, 자신이 실제로는 차별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나는 동성애를 혐오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차별에는 반대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성적 취향이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행위가 이미 차별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흑인치고 머리가 좋다’라거나, ‘여자치고 운전을 잘한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표현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차별이 자연적 조건에서 비롯하기도 하며, 사회적 구조의 불평등과 차별이 의식되지 않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II부 2장. 혐오 발언 규제 논쟁과 인권의 정치, 204~205쪽)
이것은 2018년 예멘 난민 입국 이후 드러난 난민 혐오, 2020년 코로나 초기 급증한 혐중 정서, 2021년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 입국 이후 벌어진 초등학생 입학 거부 시위, 2022년 대구의 이슬람 사원 건립 중단 등에서 확인되는 이주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적 시선에 던지는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경계가 새로운 인종차별을 구성하는 세계에서 그러한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서기 위한 기획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경계 밖이 아닌 경계 안에서도 새로운 차별들이 재생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경계 없는 세계’라는 순수 유토피아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경계 그 자체를 끝없이 개방하고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들을 발명해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과 난민들의 실천은 시민권이 특권적 지위로 전락하여 민주주의 자체를 반민주적인 방향으로 탈각시키는 오늘날 사회의 경향에 대립하는 대항 정치의 출발점을 이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날 이주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III부 3장. 국민국가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3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