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발행하며
“청 왕조 정통성을 위한 옹정제의 사상투쟁”
국내에서도 많은 연구의 대상이었고 학설도 다양했던 『대의각미록』이 도서출판 b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대의각미록』은 황제와 죄인 사이의 유례없는 대화 기록이 본격적으로 취합되어 만들어진 책이다. 옹정제는 이 책을 지어 한인의 배타적 화이관 해석에 이데올로기 전쟁을 걸고, 이를 통해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하는 한편 민간에 퍼진 황실의 소문을 논박해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옹정제가 『대의각미록』을 쓰게 된 직접적 배경은 증정의 역모 시도다. 말이 역모지 불우한 한인 서생의 해프닝이라고 할 수도 있는 사건이다. 증정 사건의 첫 보고를 받은 옹정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된 보고를 통해 주범인 증정과 장희 등이 절강성 학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역서에 담긴 정권과 자신에 대한 비난이 알려지지 않은 자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태에 엄중히 대응하기 시작한다. 옹정제는 이 사건을 “한번 기묘하게 처리해보겠다(一番奇料理)”며, 이 사건과 관련된 일체 문제에 대해, 자신이 상유를 내려 하나하나 신문하고 때로 논박하며 죄인의 생각을 듣는 과정을 국가 전체에 낱낱이 공개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최종 결과물이 『대의각미록』이다.
일개 산골 서생인 증정이 군 실권자 악종기에게 편지를 보내 역모를 권하다가 발각된다. 증정이 악종기에게 편지를 보내겠다는 망상을 느닷없이 실행하기까지 역모를 위한 어떠한 실제적인 일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호남에 파견된 심문관들이 증정의 역모 사건의 내역을 조목조목 취조했을 때 증정은 무슨 소리인지 모를 모호한 말만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증정은 피해의식과 과대망상을 오가며 약간의 지식과 여러 부정확한 정보를 결합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려낸 자에 불과했다. 이 사건은 신속히 불경한 시도를 일벌백계하고 종결하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다. 그럼에도 증정 사건은 1728년 편지를 악종기에 전한 장희의 체포부터 증정의 사상적 배경으로 지목된 여유량의 최종 처분이 내려진 1733년까지 무려 4년 이상을 끌고 간다. 그 사이 옹정제는 유교적 보편주의에 입각한 천명의 해석과 한인 지식인층에 일반화된 화이관의 반박, 청의 집권의 정당성, 사대부 도통론과의 대결을 준비하여 『대의각미록』을 만든다.
옹정제에게 증정 사건은 절강학자들의 청조 ‘정통성’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 문제로 인식되었다. 군 실권자 악종기에게 접근하려 한 증정의 시도는 청조의 한인 권력자와 한인 유생의 결합이란 점에서 연갱요-왕경기 사건의 반복이었고, 더욱이 이 사안은 화이 구분에 대한 이념적(경전적) 해석에 근거한 도전이었다. 또한 황실의 가족관계에 근거한 현 황제의 집권 정당성에 대한 비난(예컨대 선황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등)은 그간 민간에 횡행했던 청조에 대한 막연한 유언비어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참에 옹정제는 증정 사건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인 소문을 정리하고 청 왕조 집권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데 이용한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는 전국에 배포된 『대의각미록』을 회수하고 금서로 지정한다.
『대의각미록』은 1729년 증정 사안에 관한 황제의 상유와 항혁록을 통해 증정을 신문하는 데 이용했던 문서, 그리고 증정의 진술들로 이루어져 있다. 총 4권이고 판각본으로 509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1730년 전국 각 지역에 배포되면서 지역 관학에서 정기적으로 선강이 이루어졌다.
『대의각미록』 1권은 종족적, 지역적 차별을 담은 화이관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여유량이 상징하는 한인의 사상을 반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책 전체의 총론에 해당한다. 2권은 1729년 4월 중순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증정의 『지신록』, 『지기록』 등에 대한 옹정제의 질문이 주요 내용이다. 제3권은 형부시랑 항혁록과 부도통 해란이 증정에게 옹정제와 관련된 유언비어의 출처를 추가 신문하는 내용, 황제의 교화 과정, 증정에 대한 처결을 내각에 묻고, 옹정제가 사면을 관철시키는 과정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4권은 크게 여유량의 사상에 대한 비판과 증정의 회개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지은이 소개
옹정제 (지은이)
청조의 5대 황제. 성은 애신각라, 이름은 윤진이다. 묘호는 세종, 시호는 헌제이다. 격렬한 황위투쟁 과정을 거쳐, 40대 중반에 즉위하여 13년간(1722~1735) 통치했다. 강희제 시대의 안정을 확고하게 만들고, 건륭제 시대의 성세를 가능케 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형준 (옮긴이)
도양연구회에서 『주례주소』를 번역하고 있다. 연세대 정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옮긴 책으로는 『선의 역정』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묵가 정치철학 체계의 근본개념 연구」, 「유길준의 자연과 국가: 주자학적 관점의 굴절」 등이 있다.
최동철 (옮긴이)
도양연구회. 태동고전연구소를 수료했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석사 수료 후, 퇴계 정본화 사업 등에 참여했고, 『창주록』과 『단구록』 등을 공역하였다. 현재 화서학파와 관련된 간찰을 번역하고 있다.
박윤미 (옮긴이)
도양연구회. 숙명여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논문은 「高麗前期 外交儀禮 硏究」 외에 「12세기 전반기의 국제정세와 고려-금 관계 정립」, 「金代 賓禮를 통해 본 宋·高麗·夏의 국제 지위」 등이 있다.
김준현 (옮긴이)
도양연구회.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수학했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연수과정을 수료했다. 논문은 「『至正條格』 鹽法 연구」,「『주례』의 저작 시기 및 저자에 대한 시론」이 있다.
■ 차례
ㅣ해제ㅣ 유교국가의 정통성과 『대의각미록』 - 9
제1권
상유: 청 왕조의 정통성과 정당성의 근거에 관하여 - 71
상유: 증정의 역서에 담긴 황제와 황실을 둘러싼 각종 유언비어 및 이민족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논리에 대한 옹정제의 응답 - 87
성지를 받들어 신문하고 증정이 진술한 13건 - 135
제2권
성지를 받들어 신문하고 증정이 진술한 24건 - 183
제3권
항혁록 등이 신문하고 증정이 진술한 5건 - 287
옹정 7년 6월 2일 내각에서 받든 상유 - 311
악종기의 주접에 주비한 유지 수십 건을 항혁록 등이 공손히 받들어 증정, 장희에게 보이자 증정, 장희가 진술한 내용 2건 - 315
항혁록 등이 성지를 따라 『대례기주』를 공손히 받들어 증정에게 알려서 보여주고 증정이 꿇어앉아 읽고
진술한 내용 1건 - 331
항혁록 등이 성지를 따라 황상께서 각 성의 독무와 관원의 주접에 주비한 유지 수백 건을 공손히 받들어 증정에게
알려서 보여주니, 증정이 꿇어앉아 읽고 진술한 내용 1건 - 341
내각 구경 등이 성지를 좇아 다시금 증정을 신문하고 아울러 사형을 청한다는 주본을 올려, 형부 등 아문이 성지를 좇아 다시 추가 신문한 일을 주문하다 - 351
증정사건 관련 처리와 관련된 세 편의 상유 - 357
여러 왕과 대신 등이 증정을 죽이도록 재차 소청하는 제본 - 383
제4권
상유: 청조 및 강희제를 비방한 여유량의 글에 대한 옹정제의 반론 - 389
항혁록 등에게 여유량에 관한 사안에 대해 증정ㆍ장희ㆍ유지형 등을 조사하라는 상유가 내려옴에 따라, 증정 등이 올린 두 건의 진술서 - 411
상유: 청조의 재이 등을 기록한 엄홍규의 글에 대한 옹정제의 반론 - 425
상유: 「귀인설」을 첨부하는 이유 - 435
증정의 귀인설 - 437
ㅣ옮긴이 후기ㅣ - 475
■ 책 속에서
옹정擁正 6년(1728) 세상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분노와 원한에 사로 잡혀 있는,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청 왕조를 전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망상과 포부로 가득 찬 서생이 있었다.
P. 25~26
정사에 사건 발생과 처리 사실에 관해 불과 한두 줄의 기사로 남았을 사안이 황제와 역모 죄인 사이에 벌어진 미증유의 신문 기록으로 남겨진 데에는 분명 우연―순전히 개인의 개성적인 요소로 돌릴 수 있는 역사적 우연―이 작용했다. 우선 증정의 역모는 당시 만주족 정권에 불만을 지닌 일부 한인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일 테지만, 그가 역모를 위한 어떠한 실제적인 노력도 없이 부정확한 정보들에 대한 순진한 낙관만으로 정말 역모를 실행에 옮겼다는 점은 개인의 심리 문제로 남길 수밖에 없는 미스테리다. 또한 옹정제라는 전제군주가 강박증 내지 편집증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이를 의심해야 했던 황위투쟁 과정은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가상의 적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강화시켰다. 그것은 공적으로는 황제 재임 시기 만사를 자기가 완벽히 통제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났다. 더군다나 그는 ‘유교’ 전제군주였다. 주접을 통해 관료들의 모든 정책에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개입하며 논쟁하길 즐겼던 옹정제는 언제나 자신의 행위와 처결이 모두 천하 공론의 도덕적 지지를 얻을 수 있길 바랐다. 유교적 성군상에 집착했던 것이다. -(<해제, 유교국가의 정통성과 대의각미록>)
P. 74~75
아마 종래 화·이 구분에 관한 학설은 진과 송 등 여섯 왕조가 [남북으로] 일부 영토만을 차지하고 있던 시대에 비로소 생겨난 것으로, [당시 육조는] 피차 땅의 크기와 덕이 비슷하여 서로를 넘어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북방인은 남방을 도이(섬나라 오랑캐)라고 비난하였고, 남방인은 북방을 삭로(변발한 오랑캐)라고 질책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덕을 닦고 인을 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입만 가지고 서로를 헐뜯기를 일삼으면서 지극히 비루한 견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지금 역적 무리는 천하가 일통되고 화·이가 일가를 이루게 된 시대임에도, 함부로 중·외를 구분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분노를 조장했다. 천리를 거역하며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으니, 벌과 개미만도 못한 금수들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천지의 기수를 근거로 말하자면, 명대 가정 이후로 군주와 신하가 덕을 잃어 도적 떼가 사방에서 일었고, 생민은 도탄에 빠졌으며, 변경은 편안할 날이 없었는데, 당시 천지간에 기수가 꽉 막혀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본조가 건립된 이래, 도적 떼를 쓸어내어 환우가 평안하고, 정치와 교화가 구축되어 문명은 날로 성대해지고 만민은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며, 중외가 안락하여 어린아이에서 백발노인이 되기까지 일생토록 전쟁을 겪지 않았다. -(<제1권, 상유: 청 왕조의 정통성과 정당성의 근거에 관하여>)
P. 93
짐의 형제 가운데, 아기나·새사흑 등은 오랫동안 사악한 음모를 꾸미며 저위를 바라왔었다. [황위를] 주고받을 때, 황고께서 짐에게 [왕업의] 위대한 토대를 맡기겠다고 한 유조를 이들이 직접 받들지 않았다면, 어찌 순순히 수긍하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로 복종하였겠는가? 그런데도 역적은 뜬금없이 짐에게 아버지를 모해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이는 짐이, 사람들의 무고와 비방이 여기까지 이르리라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또한 역서에서는 짐에게 어미를 핍박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있다. 삼가 생각건대, 모후의 성품이 인후하고 자상하였음은 궁중 노인이든 어린이든 모두가 잘 안다. 짐은 [모후로부터] 양육과 큰 은혜를 받았고, 40여 년 동안 효성을 다해 극진히 봉양하여, 모후의 기쁨을 듬뿍 받았으니, 짐이 정말 성심을 다해 잘 봉양한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궁중의 여러 비빈들도 모두 모후께서 이런 효순한 자식을 둔 것을 칭송하고 모후께 축하를 드렸다. 이는 현재 궁 안의 내인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제1권, 상유: 정통성 부정에 대한 옹정제의 응답>)
P. 203
네가 지은 역서 『지신록』에서 “천하는 한 집안이고, 만물은 하나에 근원한다”고 했고, 또 “중화 밖의 동서남북은 모두 이적이다. 중원 지역과 가까운 곳은 오히려 조금이나마 인문의 기운이 있으나, 점점 멀어질수록 금수와의 차이가 없다” 등의 말을 했다.
이미 “천하는 한 집안이고, 만물은 하나에 근원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또다시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둔 것인가? 너 증정은 광패한 말을 방자하게 늘어놓는 것만 알 뿐 스스로 모순됨을 모른다. 『중용』에서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반드시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이다”라고 했다. 구주사해의 광활함에서 보자면 중화는 그 100분의 1을 차지하고 있을 뿐, 그 밖의 동서남북도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큰 은혜 가운데 함께 하니, 곧 이것이 천하를 통틀어 하나의 ‘이’와 하나의 ‘기’가 있다는 것이다. -(<제2권, 중화의 밖은 모두 이적이라 한 것에 대한 신문>)
P. 468
이에 나 자신의 의를 돌이켜 살피건대, 이전에 맹랑하게 [악 총독에게] 서신을 올렸던 것은, 심중이 무지하여 유언비어와 어그러진 논설에 현혹되어서, 지금 시대를 위한 군주를 구하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왕조는 이미 이처럼 정통을 얻었고, 그 공덕을 거슬러 올라가 도의를 헤아리면 상·주·한·당에 버금간다고 말하는 것도 흡족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우리 황상께서는 또 이처럼 도덕이 완비되어 천고의 세월을 초월하셨다. 비록 공자와 맹자 같은 성인이 춘추전국시대에 계셨지만, 그 성인들이 허둥지둥 다급하게 쉴 겨를 없이 뛰어다니면서 군주를 도로 이끌며 요·순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했던 까닭은, 역시 차마 생민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어 현명하고 성철한 군주를 찾아 정치를 주관하게 하려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요·순과 같은 군주가 위에 현존하시니, 실로 옛날에 없었던 융성한 시기이자 생민의 한이 없는 복과 경사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게 되면 초목처럼 무지한 존재도 오히려 영화를 입어 감화될 텐데, 하물며 몸에 혈기가 흐르는 인간은 어떻겠는가! -(<제4권, 증정의 귀인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