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소개
한국에서의 영화연구의 역사를 거칠게 분절해보면 대략 세 시기로 나뉜다. 90년대 초까지, 서구와 동구의 영화이론에 대한 초보적인 관심과 학습을 비평적으로 활용하던 시기, 90년대 중반까지, 동구권의 몰락 이후 정통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회의와 함께 알튀세르와 푸코가 갑자기 각광을 받으면서 80년대까지의 서구 영화이론이 한꺼번에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시기,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영화이론에 대한 관심이 실증적인 한국영화사 연구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어온 시기가 그것이다. 따라서 최근 각 대학 영화과에서 나오는 박사논문들이 주로 한국영화사의 개별 시기를 연구대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영화사에 대한 그간의 주목은 사실 그 이전 시기 이론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삼고 있다기보다는 이론 연구에 대한 흥미 상실의 결과인 측면이 컸다. 각종 신문 및 잡지 자료와 영화관계자들의 인터뷰 등에 주로 의존하는 이러한 실증적 연구 경향은 한국영화사의 치밀한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의미 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론적 토대의 필요성을 제거하고 이루어지는 이러한 조사연구는 어떤 의미에서 거시적인 역사적 전망의 상실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할 때『실재의 죽음: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의 이행기적 성찰성에 관하여』는 분명 9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사에 관한 연구서임에도 불구하고 후기 라캉주의라는 이론적 토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과 역사 연구의 독특한 접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책은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로 국내외에서 명명되어온 일련의 영화들을 개념화하기 위해, 이 범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는 문헌학적 방법에 의존하는 실증 연구의 장점을 살리면서 동시에 이 범주의 영화들의 정치적, 윤리적 무의식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는 후기 라캉주의적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지금까지 드물었던 만큼, 이 연구서의 출간은 어떻게 하나의 이론체계가 보편적인 이론으로서뿐만 아니라 국지적인 한국영화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도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리라 기대된다.
이 책의 연구방법론이 다름 아닌 후기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최근 후기 라캉의 이론은 슬라보예 지젝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학파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전세계적으로 널리 재신임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그간 지젝의 주저들과 문화비평서들이 대부분 출간되었다. 한 마디로 라캉주의는 지금 작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 영화이론으로서의 라캉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비평계에 영향을 끼쳐왔지만, 그러나 여전히 표피적인 수준에 멈춘 감이 없지 않다. 이 책의 저자는 그 동안 지젝의 영화연구서들을 모두 번역 소개하는 등 꾸준히 라캉주의의 영화학적 적용에 관심을 보여왔던 연구자이다. 따라서 이번에 출간된 실재의 죽음에서 저자는 라캉주의에 대한 친절하고도 상세한 해설을 시도하는 가운데, 그 이론이 90년대 초중반의 한국영화사라고 하는 구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자세한 각주들은 저자의 성실성의 작은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스캔들은 아마도 80년대 민주화 운동 및 영화운동에 대한 냉정한 윤리적 평가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저자는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의 이해를 위해 80년대 민주화 운동 주체의 무의식적 구조를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이 히스테리 담화의 구조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아가 90년대의 지식인 주체들이 어떻게 히스테리적 저항의 ‘절반의 윤리’조차도 계승할 수 없었던가를 다수의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들을 분석함으로써 논증해냈다. 그리하여 저자는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적 실천으로 간주되어왔던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를 ‘윤리적으로 실패한 실천’으로 규정하고 있다. 90년대 중후반의 한국사회 및 한국영화에 대한 이러한 ‘역사화’의 작업은 궁극적으로는 후근대적 윤리의 양태를 전망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이 작업이 비록 과감하게 기존의 관점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와 그 주체의 ‘성찰’이 후근대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시대 분위기에 이해 식민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퇴행의 뿌리를 80년대에서부터 캐내고 있는 저자의 냉정한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 저자 소개
김소연
서울여대 영문과, 홍익대 미학과 석사과정, 영국 Univ. of Kent at Canterbury, Film & Art Theory 석사과정, 중앙대 영상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최근까지 ‘도서출판 시각과 언어’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단국대, 연세대 등에 출강해왔다. 현재 예일대학교 Film Studies Program에서 방문연구자로서 연수중이다.
역서로『삐딱하게 보기』,『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영화에 관한 질문들』등이, 공저서로『매혹과 혼돈의 시대: 1950년대 한국영화』,『강원도의 힘』,『친구』,『대중영화와 현대사회』등이, 편저서로『라캉과 한국영화』가 있다.
■ 차례
1. 성찰성의 보편화와 윤리적 성찰성 7
2.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담론의 형성 23
1)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의 개념화 과정•23
2) 민족영화론의 변이와 대항영화론으로의 수렴•36
3.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의 범주적 성격 57
1) 광의의 범주와 협의의 범주의 구분•57
2) 80년대성과 90년대성의 이접과 히스테리적 혁명성의 퇴행•70
4. 주체: 귀환하는 타자들과 남성 지식인의 주체화 91
5. 대상: 적대와 트라우마의 역사주의적 상연 149
6. 형식: ‘승화의 위기’와 초자아적 응시의 형식 199
7. 실재의 윤리를 향하여 243
참고 문헌•253
후기•265
■ 본문에서
지금까지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들로서, 또 진지한 예술영화들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물론 일견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들의 실천은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듣기에 충분해 보인다. 적어도 주류 상업영화의 내용적, 형식적 관습들과의 절연을 도모했던 그 의욕만큼은 결코 평가절하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범주의 영화들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은 지금까지 대체로 일관된 반응을 끌어냈던 이 영화들의 그러한 외양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을 어떤 정치적 무의식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는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는 윤리적으로는 실패한 일련의 시도들로써 형성된 범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들은 실재와의 대면을 통해 현실 원칙에 도전하는 새로운 가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승화’의 공간을 열었다기보다는 실재의 지위에 있던 대상들을 탈승화시키고 재상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단은 그 동안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들에 대해 대체로 일관되게 부여되었던 평가를 사실상 뒤집는 것이다. -<본문, 21쪽>
■ 지은이의 말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를 90년대의 것으로 돌려놓기로 한다는 것은 이 영화들을 통해 90년대의 정치적 무의식을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정치적 무의식의 풍경에는 이미 후근대 사회로의 진입의 징후들(증상들)을 드러내던 그 시기 한국사회가 놓여 있었다. 라캉주의 정신분석은, 특히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좀 더 근본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에 복무하면서 후근대적 주체의 윤리라는 쟁점을 진지하게 제기해온 슬로베니아 학파를 통해 복원된 라캉주의 정신분석은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를 둘러싸고 형성된 나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비추어보는 데 더없이 유익한 거울이었다.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