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적 실재론,
이제 절대적인 것을 사유할 때가 되었다.”
1. 이 책을 발행하며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은 도서출판b에서 2010년에 완역 출간된 바 있는 퀑탱 메이야수의 Après la finitude: Essai sur le nécessité de la contingence (Éditions du Seuil, 2006)의 개정증보판이다. 저자 메이야수는 2012년에 1장의 후반부를 증보하여 재출간하는데, 이번에 새롭게 재출간하는 한국어판은 그 증보된 내용을 모두 반영했다.
이 책에서 메이야수는 데카르트, 칸트, 흄에 대한 비판적 독서를 통해 형이상학적 신과는 다른 절대자, 절대적인 것을 추론해 낸다. 이를 위해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근현대 철학의 주류, ‘상관주의’다.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서 주체는 대상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주체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주체와 대상 간에는 언제나 ‘상관적’(correlational)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는 상관주의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시작해, 하이데거와 니체, 비트겐슈타인을 거치며 철학의 주류가 된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는 상관주의는 결국 상대주의를 낳았으며, 인간의 유한성을 확고하게 함으로써 허무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다. 메이야수는 모든 절대자에 대한 사유를 폐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상관주의’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으면서, 사변적 사유에 의해 절대자에 대한 사유를 회복시키려고 시도한다.
메이야수는 우선 철학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선조성’이라는 신조어를, 즉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실들을 진술하는 과학 담화의 성격을 지시하는 단어를 만들어 낸 후 질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비워낸 세계, 사물들, 그리고 현시와 비-상관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세계의 기술을 허락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존재는 현시에 대한 존재의 선행성을 현시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그는 인간과 인간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존재하는 것이 실재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상관주의가 그런 진술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상관주의라는 현대의 지배적인 철학이 그토록 오랫동안 선조적 진술의 자명성을 부인해 왔다는 데 놀랄 것이다.
모든 형태의 상관주의는 ‘선조적인 것’의 연대를 추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조건을 단다. 그런데 이 조건 자체가 절대자를 인식할 수 없다는 자신의 유한성을 증명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메이야수는 선비판적 독단주의로 다시금 추락하지 않으면서도 절대자를 감당할 수 있는 절대론적 절차를 제시한다. 그것은 ‘비(非)이성’의 원리의 공식화이며, 그 요지는 사유 형식의 사실성 자체를 사실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는 근거 없이 존재하는 존재자의 우연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정립할 때 획득된다.
메이야수의 논증적 절차는 두 개의 존재론적 진술들로 요약된다: ‘필연적 존재자는 불가능하다’, ‘존재자의 우연성은 필연적이다.’ 이 두 테제는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제 절대자는 사유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사변에 의해, 신이나 뛰어난 지성으로부터 빌려온 신비적인 물리적 필연성의 옷을 입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메이야수는 과학의 뒤를 따라붙던 철학의 위상을 전복시키고, 과학의 실효성을 인정하면서 그로부터 절대자에 대한 사변을 시작할 것을 요청한다. 관건은 과학이 철학에게 건네는 다음의 질문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달려있다. ‘거기에 사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유는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사유할 수 있는가? 그러한 사유는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하는가?’
메이야수 철학의 적극적 소개자이자 프랑스 철학 박사인 정지은은 이번 개정증보판 발간을 위해 2010년의 초판 번역을 전면적으로 손봤다. 현대철학의 가장 강력한 조류가 된 사변적 실재론의 주창자인 메이야수의 주저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는 새로운 철학 운동의 맨 앞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2. 저자 소개
■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1967년 파리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97년 파리1대학 팡테옹-소르본에서 베르나르 부르주아의 지도하에 신의 비실존, 잠재적 신에 대한 시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에 알랭 바디우, 이브 뒤루와 함께 국제 현대 프랑스 철학 연구 센터(CIEPFC)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2007년 영국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레이 브래시어, 그레이엄 하먼 등과 함께 상관주의 철학을 비판하고 절대를 복권시키려는 새로운 철학 운동을 주창함으로써 오늘날 ‘사변적 실재론’이라 불리는 철학 조류를 이끌고 있다. 현재 파리1대학 팡테옹-소르본의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유한성 이후>, <수와 사이렌>, <생성 없는 시간> 등이 있다.
■ 정지은
홍익대 교양대학 조교수.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수학한 뒤, 프랑스 부르고뉴대학교에서 철학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프랑스 현상학과 예술철학이다. 저서로 <말: 감각의 형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공저), <신유물론: 몸과 물질의 행위성>(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유한성 이후>,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몸: 하나이고 여럿인 세계에 관하여>, <철학자 오이디푸스> 등이 있다.
3. 차례
서문 ㅣ 알랭 바디우
선조성
형이상학, 신앙절대론, 사변
본사실성의 원리
흄의 문제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수
4. 옮긴이의 말
“메이야수는 강한 상관주의가 절대자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면서 이성을 온갖 종교적 신화에 노출시켰다고 진단 내린다. 형이상학과 절대자의 관념이 낡았다는 주장과 함께 종교는 유일신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대신 온갖 종류의 신앙을 허용하게 되었다. 현대 철학 역시 종교의 이런 탈절대화적 양상을 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상관주의로부터 파생된 사유의 경향들 속에서,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은 바디우가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유의 운명이―‘종교적인 것의 복귀’가 영혼의 허구적 보충물을 제공해 주는 가운데 우리가 자족해 하는 저 단편들과 부분적 관계들이 아니라―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정당화한다’. 그는 이 첫 저서에서 회의주의적, 혹은 신앙절대론적인 경향의 현대 철학에 맞서서 다시금 절대적인 것에 대한 사변을 시작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그렇지만 그는 현재의 시각에서 일종의 사유의 감행일 수 있는 절대자의 회복을 단순히 주장하는 대신―사실상 우리가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어떤 프로파간다적 형태다―매우 세련된, 그렇지만 동시에 매우 과감한 논증의 방식으로 그 타당성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가듯이 그의 논증을 따라가는 것이 이 책의 독서에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5. 본문 속에서
“용어를 정하자. ―우리는 인간 종의 출현에 선행하는―심지어 집계된 지구상의 전 생명 형태에 선행하는―실재 전부를 선조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 (1장. 선조성)
“과학자는 자신이 기술하는바 선조적 사건이 확실히 일어났다고 단호한 방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칼 포퍼 이래 우리는 실험과학을 통해 발전된 모든 이론이 원리상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다듬어지거나 경험에 더 일치하는 이론을 위해 선행하는 이론이 거부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진술이 참이라고 가정할 이유가 있다고 과학자가 생각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사건은 결과적으로 그가 기술하는 바대로 일어났을 수 있고, 또 다른 이론이 그의 기술을 밀어내기 전까지 그가 재구성한 기술로 사건의 실존을 인정한다는 건 합법적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그의 이론이 거부된다면, 이는 여전히 선조적 영역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위해서, 그 또한 참이라고 가정된 또 다른 이론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선조적 진술들은 실험과학이 발전하는 가운데 주어진 어느 순간에 바로 그 과학에 의해 유효성을 인정받는 한 그 지시물들이(과거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실재로서 제시될 수 있는 진술이다.” (1장. 선조성)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재정식화할 수 있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는 현대 과학의 선조적 진술들을 합법화할 수 있는가? 이것은 특수성을 지닌 선험적 방식의 질문이다. 그리고 그 특수성이란 선험적인 것의 포기를 제1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선조성을 문제처럼 여기지 않는 두 가지 방식인 소박한 실재론과 상관주의적 능란함, 모두에 대해 동등하게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소박한 실재론자와는 반대로) 상관관계적 원환의 외관상 피할 수 없는 힘을, 그리고 (상관주의자와는 반대로) 그러한 상관관계적 원환과 선조성의 돌이킬 수 없는 양립 불가능성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비-철학에 비해 철학이 갖는 이점은, 강력한 의미에서, 철학자만이 선조적 진술의 오로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대해 놀라워할 수 있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선험적인 것의 덕은 실재론을 환영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몹시 놀라운 것으로― 사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그런 자격에서 근본적으로 문제적인 것으로―만드는 데 있다.” (1장. 선조성)
“이제는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제기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 질문들은 질문의 외양만을 가진, 혹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시효를 상실한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질문들이거나 그것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적 질문들의 불용성[해결 불가능성]에 대한 현대적 믿음이 이성 원리에 대한 항구적 믿음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포착한다. 왜냐하면 사변은 결국 그와 같은 존재의 궁극적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믿는 자만이 또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그 어떤 해결의 희망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대답의 본질이 하나의 원인, 하나의 필연적 이유를 발견하는 데 있다고 믿는 자만이 그러한 문제들이 해답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이는 정당하다. 사유의 한계들에 대한 담화, 이제 우리는 그것이 형이상학에 대한 부인을 유지하는 태도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진정한 종언은 용해로부터 과거의 질문들의 침전을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획처럼 우리에게 드러난다― 결국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최고의 합법성을 되돌려 받게 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질문들을 해소하면 할수록, 우리는 형이상학의 본질을, 형이상학이 자신의 근본적인 공준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의 산출처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이성 원리의 포기만이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4장. 흄의 문제)
“틀림없이 사람들은 이와 같이 공식화된 질문이 여전히 모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propos는 여기서 해결 그 자체를 다루는 게 아니었다. 과학의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철학의 프톨레마이오스주의 사이의 불일치가―그러한 분열이 유지될 수 있게 하는 부인否認들이 무엇이든지 간에―한없이 깊어만 가고 있는 시점에서, 사유의 절대적 영역을 재발견하는 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시급하다는 것을 설득시키려는 시도만이 우리에게 중요했다. 흄의 문제가 독단주의적 잠으로부터 칸트를 깨어나게 했다면, 사유와 절대적인 것 사이의 화해를 약속하는 선조성의 문제가 상관주의적 잠으로부터 우리를 깨어나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 보자.” (5장.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