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발행하며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The Indi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Verso, 1996)을 완역한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나눌 수 없는 잔여』는 두 가지 점에서 지젝의 다른 책들과 구분된다. 첫째, 이 책에서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헤겔을 참조하는 대신 셸링을 참조한다. 둘째, 지젝은 셸링을 독일 관념론의 전통 속에서 위치시키는 전통적인 독해를 넘어서, 루크레티우스와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유물론의 전통 속에 위치시킨다. 특히 이 책 『나눌 수 없는 잔여』에서 지젝이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셸링의 책은 『세계의 시대들Die Weltalter』이다. 지젝에 따르면, 셸링은 그 책에서 의식은 무의식이라는 토대 위에, 역사는 신의 광기라는 토대 위에, 개별자indivisible로서의 주체는 나눌 수 없는indivisible 대상이라는 토대 위에서 분만된다. 바로 이 토대가 지젝이 주목하는 셸링의 유물론적 요소이다. 이 토대로서의 무의식, 신의 광기, 대상은 독일 관념론이 강조하는 의식, 역사, 주체를 분만할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의식, 역사, 주체 속에서 ‘나눌 수 없는 잔여’로 끈덕지게 존재하는 것이다. 지젝의 표현을 빌자면, “반성적 이념화에 저항하는 실재, ‘나눌 수 없는 잔여’는 이념화/상징화가 삼킬’ 수 없고 내면화할 수 없는 일종의 외적 중핵이 아니라, 이념화/상징화를 정초하는 제스처의 ‘비합리성’, ‘설명할 수 없는 광기’이다.”
이러한 셸링 철학의 유물론적 독해를 통해 지젝은 셸링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서, 지젝은 ‘나눌 수 없는 잔여’로서의 이러한 셸링의 유물론적 ‘토대’를 라캉의 실재의/로서의 잔여와 연결시킨다. 즉 상징화가 그 안에서 완전히 나눌 수 없는 잔여, 상징화의 배설물로서의 잔여로서 말이다. 또한 지젝은 이 ‘나눌 수 없는 잔여’인 셸링의 유물론적 ‘토대’를 라캉의 대상 a와 연결시킴으로써 라캉의 주체를 유물론적으로 독해하려는 시도를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 『나눌 수 없는 잔여』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독일 관념론, 혹은 전통 철학의 중심 주제로서의 의식, 역사, 주체는 그것들의 토대인 무의식, 광기, 대상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도록 ‘나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것들 속에 ‘잔여’로서 남아 있다. 둘째, 주체만이 ‘나눌 수 없는’ 개별자indivisible가 아니라, 항상 무한히 나누어진다고 생각되던 대상도 이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 된다. (사실, 라캉에게서 주체는 이미 나누어져 있다.) 따라서 대상과 주체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대리보충한다. 마지막으로, 산수에서 ‘나머지’는 하나의 수가 다른 수에 의해서 정확히 나누어 지지 않을 때 남는 양인 것처럼, 나눌 수 없는 ‘잔여’는 상징계, 즉 의미화 네트워크에 의해서 정확히 나누어지지 않는 주이상스/실재의 ‘나머지’이다.
지젝의 비교적 초기 저작인 『나눌 수 없는 잔여』의 국내출간을 통해서, 국내 독자들은 이미 국내에 출간 번역되어 있는 다른 책들과 함께 지젝의 지적 여정을 다시 한 번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여정 속의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저역자 소개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철학, 맑스주의 정치를 독창적으로 결합하여,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부분에 개입하고 있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정신분석 이론가이자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요 저서로는 『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나눌 수 없는 잔여』, 『신체 없는 기관』, 『시차적 관점』, 『이라크』, 『삐딱하게 보기』등 다수가 있다.
이재환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현재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 지은이의 말
“이 책은 유물론을 발생시킨 작품 중의 하나인 셸링의 『세계의 시대들』초고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공헌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씌어졌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셸링은 유물론자인가? 오히려 그는 의인적이고 전–과학적인 신지학의 최후의 위대한 대표자가 아닌가? 셸링의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한 앙리 르페브르는 번역의 서문에 이 논문은 “확실히 진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다”라고 썼다. 이 진술의 역설을 놓치지 않는 조건에서 우리는 이 진술을 우리의 안내자로써 이용할 수 있다. 즉 진리의 핵심을 얻기 위해서 셸링에게서 진리가 아닌 것, 그의 체계의 잘못된 외관을 거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동시대적 관점에서는, 진리는 노골적으로 ‘진리가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 뒤얽혀 있어서 ‘진리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이나 측면을 폐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불가피하게 진리 그 자체의 상실을 가져온다. 아기를 잃지 않고 욕조의 더러운 물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서론에서>
이 책의 역자로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책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1991[2002]),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로 이어지는 이른바 ‘칸트적인 (혹은 칸트보다 더 칸트적인)’ ‘전기 지젝’과 『시차적 관점』(2006)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후기 지젝’을 연결하는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젝의 최근 책들까지 거의 번역되어 있는 상황에서 1996년에 출간된 이 책이 국내의 지젝 이해의 ‘잃어버린 한 조각’의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옮긴이 후기에서>
■ 차례
서론 7
제1부 셸링,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원에서
1장 셸링–그–자체[즉자적 셸링]: ‘힘들의 오르가즘’ 25
기원 이전•25 무의식적 행위•31 존재의 수축•41 충동과 충동의 순환운동•52 자유에서 자유로운 주체로•62 신적 광기•69 셸링의 정치•76 원초적 불화•81 ‘상징적 거세’•89 반성의 역설•96 관념들의 잠재적 현실•100 영원성에서 시간으로의 상승•103 ‘얽힘enchainment’•107 ‘자기성Selfhood 그 자체는 정신이다’•111 실존과 그것의 토대•116 실존과 토대의 도착적 통일로서의 악•119 자유의 세 단계•130 주체의 유물론적 개념•134 ‘정신 나간[바깥의]out of mind’ 절대자•140 ‘세계 공식’•145
2장 헤겔에 대한 셸링―‘사라지는 매개자’ 153
주체화/예속화에서 주체적 결핍으로•153 욕망 대 충동•158 ‘목소리는 목소리다’•165 범주로서의 ‘그리고’•172 라랑그lalangue의 모호한 지위•178 관념론은 무엇인가?•184 근대성의 ‘억압된’ 기원•191 거절/좌절Die Versagung: 폴 클로델Paul Claudel에서……•193 ……프란체 프레셰렌France Prešeren으로•202 변증법적 실체변환transubstantiation•209 어떻게 정신은 자기로 되돌아오는가?•215 텅 빈 기표 없는 주체는 없다•221 다급한precipitate 동일시•227 ‘객관정신’이라는 가상semblace•236 상징적 속임수•242 ‘A는 a이다’•248 대리보충으로서의 목소리•255 쇼파르Shofar•259 라캉의 ‘성차공식’을 읽지 않는 방법•270 가장(假裝)으로서의 여성성•275 히스테리를 찬양하며•283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292
제2부 관련된 문제들
3장 양자물리학과 라캉 307
‘접속된wired’ 욕망•307 데카르트적 사이버펑크•316 반성된 이데올로기로서의 냉소주의•325 냉소주의 대 반어•335 양자물리학의 ‘11번 테제’•343 ‘상보성Complementarity’•347 역사주의에 반대하며•353 어떻게 우리는 쥐인간을 만들 수 있을까?•361 ‘이중슬릿’의 다섯 가지 교훈•366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380
옮긴이 후기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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