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발행하며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uke University Press, 1993)을 완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칸트와 헤겔이라는 독일관념론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주체의 이론을 정교하게 구성해내고 있으며, 이를 이데올로기 이론에 적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선 이 책에서 지젝은 다른 그 어떤 저술에서보다도 완결적인 방식으로 주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업은 이 책의 제1부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지젝은 주체의 이론이 포괄해야 할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특히 지젝은 자신의 동료 조운 콥젝의 선구적 연구를 이어받아, 남성적 주체와 여성적 주체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고 있는데, 이는 다른 그 어떤 저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 지젝은 헤겔의 논리학을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이 작업은 알튀세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헤겔에 대한 정교한 독서를 통해서 어떻게 헤겔의 본질의 논리학이 이미 알튀세르가 헤겔을 비판하기 위해 정교화했던 개념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1부와 2부에서 주체의 이론과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교하게 제시한 이후에, 3부에서 지젝은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문제를 다룬다.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지젝은 근본적 진단은 그것이 스피노자적 우주, 즉 큰타자가 붕괴된 우주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과 주인에게 도전하는 주체들은 궁극적인 문제들을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문제는 텅 비어 있는 주인의 자리에서 그 텅 빈 자리를 채우지 않은 채 어떻게 머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가 가리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헤겔과의 단절을 시도했던 세대들에게 다시 헤겔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다. 왜냐하면 헤겔의 저작 속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체에 대한 근본적 사유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헤겔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이 책은 헤겔의 부활을 위한 초석이나 기폭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 저역자 소개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철학, 맑스주의 정치를 독창적으로 결합하여,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부분에 개입하고 있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정신분석 이론가이자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요 저서로는 <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나눌 수 없는 잔여>, <이라크>, <삐딱하게 보기> 등 다수가 있다.
이성민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미학과 대학원에서 수학. 현재 도서출판 b에서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역서로는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의 철학사상>, 레나타 살레츨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 슬라보예 지젝의 <이라크>, <까다로운 주체> 등이 있다.
■ 차례
서 론 9
1부 코기토: 주체라 불리는 공백
1. “사고하는 ‘나’, 또는 ‘그’, 또는 ‘그것’(사물)” 19
누아르 주체 - 19탈구된 - 26칸트에서 헤겔로 - 39
비등가교환 - 45화폐와 주체성 - 54
주체에서 실체로…… 그리고 거꾸로 - 58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주체 - 66
한계는 초월에 앞선다 - 70“토탈 리콜”: 실재 속의 지식 - 78
2. 코기토와 성적 차이 89
보편자 속의 칸트적 균열 - 89
기독교적 숭고, 혹은 “아래로의 종합” - 98
“성 구분 공식” - 105“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있지 않다” - 115
환상응시로서의 코기토 - 121
“자기의식은 하나의 대상이다” - 128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136
촉박한 동일화 - 144
2부 에르고: 변증법적 부당도출
3. 근본악 및 관련 문제들에 대해서 161
“칸트를 벤섬과 더불어” - 161환영과 현실 - 172
“당신을 문 개의 털” - 176근본악 - 184
파이프들과 파이프들이 있다 - 197비상호주체적 타자 - 205
무한 판단의 대상 - 210아테와 그 너머 - 220상징적 지복 - 231
4. 이데올로기 이론으로서의 헤겔의 “본질의 논리학” 241
불충족이유율 - 241동일성, 차이, 모순 - 253
형식/본질, 형식/질료, 형식/내용 - 260
형식적 근거, 실재적 근거, 완전한 근거 - 264
“즉자”에서 “대자”로 - 272근거 대 조건 - 283
동어반복적인, “사물의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 - 286
“생성의 절대적 불안정성” - 296가능한 것의 현실성 - 302
3부 숨: 향유의 원환고리
5. “상처는 당신을 찌른 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315
실재의 응답 - 316주체성과 은총 - 324
모차르트에서 바그너로 - 332
“나는 여러분에게 라멜르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 340
바그너적 수행문 - 349남근을 넘어 - 355
신의 향유를 “간수하기” - 365도착적 원환고리 - 372
6.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 385
“향유의 도둑질” - 386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 395
자유주의의 맹점 - 407
스피노자주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 416
근본악의 꿈에 의해 설명되는, 민족주의의 꿈들 - 422
동유럽의 “사라지는 매개자” - 434
“큰타자”의 붕괴 - 443
옮긴이 후기 454
인명 색인 461
■ 지은이의 말
“라캉은 후근대적인 새로운 소피스트들 가운데 한 명인가?”라고 묻는 것은 전문적인 학술적 논의의 따분함과는 거리가 먼 어떤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과장법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 (이른바 “서구문명”의 운명에서 시작해서 생태위기 속에서의 인류의 생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연관된 물음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오늘날 새로운 소피스트들의 후근대적 시대와 관련하여, 필요한 변경을 가하여 칸트적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서론 부분>
지젝에게 헤겔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 헤겔과 더불어 지젝은 알튀세르가 충분히 멀리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헤겔과 더불어 지젝은 들뢰즈가 너무 성급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실로 알튀세르를 읽다보면 알튀세르가 엄밀한 라캉적 의미에서의 “주체”와 “향유” 개념을 사유했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알튀세르는 분명 주체성의 문제를 그곳까지 가지고 가지 않았다. 또한 들뢰즈를 읽다보면 그가 충동의 문제에 너무 빨리 접근했으며, 그러는 동안 주체 본연의 차원(즉, 분열된 주체)을 놓쳤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옮긴이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