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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부제목 잃어버린 항아리
시리즈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3
출판일 2004-04-30
저역편자 슬라보예 지젝
출판사 도서출판 b
가격 15,000
도서규격 양장본ㅣ238쪽ㅣ150x218mm
ISBN 978-89-9545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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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하여

 
슬라보예 지젝은 대중문화 분석이나 철학적 재해석/재돌파의 작업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개입이나 발언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다. 얼마전부터 그는 9.11 테러나 이라크 전쟁에 대해 다양한 경로로 발언해왔는데, 이번에 그것의 결정판이라고 해야 할『이라크』라는 저술을 내놓았다.『이라크』는 지젝의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정치적” 저술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이라크』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다루는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지젝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단지 이라크 전쟁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단지 “이라크”만을 보려고 하는 것을 지젝은 “거짓 구체성의 유혹”이라고 명명한다. 오히려 지젝은 “이라크”라는 맥거핀을 통해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세계 제국에서 발송하는 이라크 공격이라는 메시지의 진정한 수신자는 이라크가 아니라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국가)이라는 지젝의 설득력 있게 주장을 펼치는 이 책은, 서론: 그들은 이라크를 통제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가, 1장 이라크와 그 너머, 2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 3장 지배와 그 너머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이라크와 그 너머에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 논리의 허구성을 예리하고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런 연후에 지젝은 곧바로 대이라크 공격에 진정으로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미국을 “세계 제국”으로 바라보는 일반적 (혹은, 네그리적) 통념과는 달리 지젝은 미국이 세계 제국인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행동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문제를 찾고 있다. 미국은 사고는 국지적으로 하면서 행동은 세계적으로 하고 있는, 그리고 그럼으로써 전세계에 온갖 문제를 야기하는 유일무이한 불량 국가인 것이다.
 
2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로에서 민족국가 제국의 이데올로기인 다원주의적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와 맹점들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라클라우/무페가 제안한 “근본적” 민주주의 또한 비판한다. 그로써 지젝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그 극한에서 사고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2장에서 이루어지는 지젝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 정치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논의들이 더 이상 피해갈 수만은 없는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며,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유보적 지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본격적 비판으로의 지젝의 전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것이다.
 
3장 지배와 그 너머는 오늘날의 지배의 구조가 어떤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현대의 지배논리로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이동에 대한 문제를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지젝은 라캉의 네 가지 담론 이론에서 “담론”을 “사회적 결속”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담론의 변동에 대한 라캉의 이론은 오늘날의 지배구조 변동에 대한 이론으로서 지젝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간 문화비평가 정도로 알려져 있던 슬라보예 지젝의 약력을 조금 복잡하게 만들만큼 본격적인 정치철학서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은『이라크』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무조건적으로 응답해주었다. 세계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난하고 있고, 또한 이미 그 침공에 파병을 한 국가들이 군대를 철수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라크 추가 파병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럼으로써 한국은 영국, 일본과 함께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에 적극적인 협조를 하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한 차에 『이라크』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국어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목차
 
서론〕그들은 이라크를 통제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가?
 
1) 이라크와 그 너머
이라크 맥거핀
민족국가 제국
유럽, 낡고도 새로운
영웅과 겁쟁이 이야기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
중동에서의 행위를 위한 온건한 제안
“조용한 혁명”
 
2) 민주주의와 그 너머
자유주의적 날조
행위, 악, 그리고 안티고네
바깥으로의 한 걸음을 무릅쓰기
민주주의를 위해선 너무나도 근본적인?
“무의식은 정치다”
유토피아와 온화한 살인 기술
 
3) 지배와 그 너머
윤리적 폭력? 좋아요!
네 가지 담론
무카페인 현실 한 잔
무구한 폭력
고상한 거짓말과 쓰라린 진리에 관하여
 
인명 색인
옮긴이 후기
 
■ 지은이 소개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그는 라캉의 정신 분석학과 헤겔의 관념 철학, 대중 문화론, 미학, 정치 이론을 자유자재로 결합하면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펴고 있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정신 분석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 Mladina>의 정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 <삐딱하게 보기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1991),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1993), <불가분의 잔여 The Indi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1996)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Enjoy Your Symptom: Jacques Lacan in Hollywood and out>(1992)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Lacan(But Were Afraid to Ask Hitchcock)>(1992) 등이 있다.
 
박대진
서울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있다. 현재 정신분석학의 정치적 함의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으며, 역서로는 레나타 살레클의『자유의 전리품』(근간) 등이 있다.
 
박제철
서울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중앙대학교에서 영화이론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영화 이론/비평과 정신분석적 윤리를 (재)단락시키려는 구상 하에 번역,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로는 조안 콥젝의『여자가 없다고 상상해 봐』(근간), 슬라보에 지젝의『신체 없는 기관』(근간) 등이 있다.
 
이성민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와 동대학원 미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정신분석 공부를 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저술 및 번역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로는 마이클 하트의『들뢰즈의 철학사상』, 레나타 살레클의『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미란 보조비치의『암흑지점』등이 있다.
 
■ 저자 서문
 
그들은 이라크를 통제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가?
 
물론 국민은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 하지만 결국 정책을 결정하는 건 그 나라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국민을 끌고 가는 건 언제나 간단한 문제입니다. …… 국민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리고 평화주의자들은 애국심이 없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효과가 있습니다. (헤르만 괴링,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이 책의 제목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이후에 박물관이나 고고학 유적지에서 사라진 (틀림없이 적당한 때가 되면 우선은 암거래 미술품 시장에 다시 나타났다가 다음엔 합법적인 시장에 다시 나타날) 고대의 항아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그 항아리들은 빌려간 것이 아니라 훔쳐간 것이다. 이라크의 박물관과 고고학 유적지의 약탈에 관한 걱정들은 다시금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이라는 자유주의적 태도의 위선과 허위를 보여주었다.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다른 항아리가 있다. 꿈의 이상한 논리를 보여주기 위해 프로이트가 이용하는 농담에 나오는 항아리 말이다. (1) 나는 당신에게 항아리를 빌린 적이 없다. (2) 나는 항아리를 깨지지 않은 상태로 돌려주었다. (3) 당신에게 항아리를 빌렸을 때 그건 이미 깨져 있었다. 물론 비일관된 주장들의 이와 같은 나열은 그것이 부인하고자 하는 것(나는 깨진 항아리를 돌려주었다)을, 부정을 통해, 승인하는 것이다. 2003년 초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정당화 역시 이와 동일한 비일관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1) 사담 후세인은 그의 이웃이나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미 모든 민주적 서방 국가들에게도 “분명하고도 현재적인 위험”을 제기하는 대량살상무기(WMD)를 소유하고 있다. (2) 그래서 2003년 9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수색을 맡았던 CIA 관리 데이비드 케이David Kay가 (천명 이상의 미국 전문가들이 그 무기들을 찾느라 몇 달을 허비한 후에) 현재까지 그와 같은 무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을 시인해야만 했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비록 사담이 전혀 WMD를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9.11 공격의 알카에다와 연루되어 있었고 따라서 9.11에 대한 정당한 보복의 일부로서 그리고 그러한 공격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담은 처벌되어야 한다. (3) 하지만 다시금 2003년 9월에 부시조차도 다음과 같이 시인해야만 했다. “사담 후세인이 9.11 공격에 연루되어 있다는 어떤 증거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국민의 거의 70퍼센트가 그 이라크 지도자가 9.11 공격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고 믿는다는 최근의 여론 조사 결과와 관련하여 이 고통스러운 시인을 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비록 알카에다와 연계되어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사담 정권은 무자비한 독재정권이며, 이웃에 대한 위협이며, 이라크 국민 자신들에게도 재앙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후세인 정권을 와해시킬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시금 문제는 공격 이유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주장에 일관성의 허울을 부여해준 것은 물론 이데올로기였다. 전쟁 전에 화면에서 끝없이 반복된 사담의 이미지(공중에 라이플 소총을 발사하는 사담)는 그를 일종의 이라크판 찰톤 헤스톤으로 만들었다. 이라크 대통령이기도 하면서 또한 이라크 라이플협회 회장인 사담. …… 그렇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진짜로 관심을 끄는 것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어떻게 논증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차원에서도 일어나는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이미지가 하나의 장場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어떤 관념이나 체제나 문제를 전형적으로 체화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인가를 말이다. (이제 반쯤은 잊혀진) “전쟁의 얼굴” 제시카 린치를 생각해보자.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제스처 속에서 그녀는 미국 병사의 전형으로서 고양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세 가지 층위에서 읽어볼 수 있는데, 이는 다시금 라캉의 ISR 삼항조에 조응한다. 첫째로, 그녀는 상상적 볼거리였다. 그녀는 부드럽고 연약한, 완전히 미국적인 보통 소녀였으며, 야수적인 병사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의 정반대였다. …… 그 다음으로 물론,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적인 배경, 상징적 층위의 미디어 조작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지만 결코 하찮지 않은 것으로서, 우리는 경제라는 “세속적” 측면 그 자체를 잊지 말아야 한다. 제시카는 나중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목적 때문에 미군에 입대했다. 즉 그녀는 위기에 처한 시골 공동체의 촌스러운 하층 계급 인생에서 탈출해보려고 입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녀가 “승리의” 귀향을 했을 때 이는 오히려 그녀가 탈출하려 했던 감옥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표정이 불안해보였고 귀향의 광경이 실제로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컴퓨터로 유도되는 발사체가 목표물을 타격하는 카메라 쇼트로 요약되며 전쟁을 추상적인 컴퓨터 게임으로 만든 1991년의 걸프전(걸프전의 전투 장면에 대한 아무런 보도도 없었으며 보도금지는 철저했다)과는 대조적으로 2003년의 이라크전은 “전장 속의 기자들embedded reporters”―군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일상 생활과 전투 자체를 생방송으로 보도하며 따라서 “인간적 촉감”을 제공하고 시청자의 관점이 병사의 관점과 즉각 동일화될 수 있도록 해주는 종군기자들―에 의해 요약된다. 이러한 변화와 관련하여, 그 두 접근법 모두가 엄밀히 헤겔-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어떻게 추상적인 것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굳이 말한다면, 추상적-기술적技術的 비디오게임식 접근법에는 전쟁의 진정한 본성에 관련한 더 많은 진리가 있다. 전투원들의 경험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전쟁의 진정한 세계적 의미를 제공하는 구체적 총체를 흐려놓는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접근법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이 전쟁 보도와 관련하여 예전의 아도르노적인 비판적 제스처를 되풀이하고만 싶다: 진리는 두 양태, 즉 추상적 디지털적 층위와 개인적 경험의 “인간적 접촉”이라는 층위 간의 바로 그 분리이다. 즉 진리는 이 분리가 환원불가능하다는 것, 그 둘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분모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실재적 이유였는가? 기묘하게도 사실상 세 가지가 있었다. (1)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민주주의와 번영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진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 (2) 무조건적인 미국 헤게모니를 난폭하게 단언하고 알리려는 추동. (3) 이라크 석유 보유고에 대한 통제. 이 세 가지 층위 각각은 그 자체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한낱 기만적인 허울로서 기각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베트남 전쟁 이후에 가장 기본적인 미국의 반응을 상기해보라: 우리는 단지 좋은 일을 하려고, 남을 도와주려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보답으로 우리가 무엇을 얻는지 보라. …… 존 포드의 <수색자>Searchers나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와 같은 영화의 근본적 통찰은 오늘날, 전세계적인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더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타당한 것이다. 우리는 “조용한 미국인”, 즉 베트남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와 서구적 자유를 가져다주길 진지하게 원하는 소박하고 인정 많은 행위자 형상의 부활을 목도한다. 단지 그들의 의도가 전적으로 실패하고 마는 것뿐이다. 혹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의 말대로 “나는 자신이 야기시킨 그 모든 분쟁에 대해 더 선한 이유를 가진 사람을 결코 알지 못한다.”
 
두 번째 이유와 관련해서, 윌리엄 크리스톨William Kristol과 로렌스 카플란Lawrence F. Kaplan은 최근에『대이라크 전쟁』The War Over Iraq에서 이렇게 썼다: “임무는 바그다드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첨두에 서 있다. …… 이것은 결정적 계기다. ……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게도 이라크 이상의 문제다. 그것은 심지어 중동의 미래나 대테러 전쟁 이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국이 21세기에 어떤 유형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가의 문제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걸려있는 것은 사실상 국제 공동체의 미래이며, 다시 말해서 그것을 규제할 새로운 규칙들이며, 새로운 세계 질서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석유에 대해서 말하자면, 2003년 6월 미디어에서 보도된 것처럼 폴 울포위츠Paul Wolfowitz는 WMD 쟁점을 전쟁에 대한 “관료주의적” 구실이라고 기각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석유가 진정한 동기였다고 공공연히 인정한다. “단순하게 바라봅시다. 북한과 이라크의 가장 큰 차이는 경제적으로 볼 때 이라크에는 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석유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핵심 요인은 분명 그 가운데 것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좌표들에 말뚝을 박기 위해서, 예방적 차원의 공격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리하여 미국의 지위를 유일무이한 세계 경찰의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이라크를 구실이나 본보기로 사용하는 것. 메시지는 이라크 국민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었으며, 일차적으로는 전쟁을 목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보내진 것이었다. 우리는 그 메시지의 진정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인 표적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새로운 전망은 최근 미국 정치의 유력한 가이드라인으로서 출현하고 있다. 9․11 이후로 미국은 신뢰할 만한 파트너의 명부에서 나머지 세계를 지워버렸다. 따라서 궁극적 목표는 보편적인 자유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후쿠야마적 유토피아가 더 이상 아니며, 미국을 “요새 미국Fortress America”으로,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고독한 초강대국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즉 지구상 어느 곳이건 신속하게 배치시킬 수 있는 군대뿐만 아니라 우주 상공에서 지구 표면을 통제하기 위한 우주 무기들의 개발도 포함하는 새로운 군사력을 통해 미국의 핵심적인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미국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최근 갈등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유럽이 미국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자신은 유럽과의 배타적 공조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공조에 더 이상 의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전망은 이데올로기적 허구이다(오늘날의 시대에 격리된 “요새”로서의 국가라는 생각은 전혀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엄청난 물질적 힘을 갖는 허구이며, 거대한 국가 기구와 경제·군사적 조치 속에서 구현되는 허구이다.
『이라크』는 이러한 비일관된 논증이 은폐하는 동시에 가리킬 수밖에 없는, 즉 은폐의 바로 그 제스처 속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 이라크 공격에 대한 세 가지 “진정한” 이유들(첫째로,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믿음―“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다”라는 부시의 말. 둘째로,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단언. 셋째로, 경제적 이해관계―석유)은 “시차視差parallax”처럼 취급되어야 한다. 즉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것이 아니며, “진리”는 오히려 그것들 사이에서의 관점의 이동 그 자체이다. 그것들은 ISR처럼 서로 관계맺는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상상적인 것, 정치적 헤게모니라는 상징적인 것, 경제라는 실재가 있으며, 후기 라캉의 말처럼 그것들은 매듭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하여 2장과 3장에서 이 책은 직접적인 정치적 분석으로부터의 점진적인 “추상”의 길(혹은, 오히려 헤겔식으로 보자면, 구체적 총체성을 향한 길)을 따른다. 우선 그것은 전쟁을 정당화함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하는 민주주의 및 민주주의의 수호에 대한 참조를 의문시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를 특징짓는 지배의 구조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이 책의 숨겨진 문학적 모델은, 문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을 최고로 발휘한 작품이며 또한 베스트셀러 작품인『래그타임, 혹은 빌리 배스게이트』Ragtime or Billy Bathgate보다 훨씬 더 탁월한 작품으로서, 내가 닥터로우E. L. Doctorow의 대작이라고 생각하는『시인의 생애』Lives of the Poets: Six Stories and a Novella이다. 이 작품에는 완전히 이질적인 여섯 편의 단편(아버지의 죽음을 은폐하는 과제를 맡게 된 아들, 구조자들에게 무정하게 취급되는 물에 빠진 아이, 사냥꾼의 총에 맞는 고독한 학교 교사,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하는 소년, 자동차 폭발로 사망하는 외국인 여학생)이 있고, 여기에 한 편의 중편이 첨가된다. 이 중편은 오늘날 뉴욕에 사는 작가의 일상 생활의 혼란스러운 인상들을 묘사하는데 이 작가는, 우리가 곧바로 추측하게 되는 바, 그 여섯 이야기를 쓴 저자이다. 이 책의 매력은 일상 생활의 원재료를 예술적으로 돌파하는 과정을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이라크』의 주요 장[1장]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관해 펼쳐지는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 인상들과 반응들의 (때로는 다소 혼란스럽기도 한) 잡동사니이다. 그리고 두 편의 부록이 이를 뒤따르는데, 그것들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직접적 반응들로부터 증류된 보다 일관된 이론적 분석들―민주주의와 그것의 불만들, 현대의 지배 논리(주인 담론에서 대학 담론으로의 이동)―을 제공한다.
 
따라서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식으로 나는 ꡔ이라크ꡕ는 이라크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또한 이라크 위기와 전쟁 역시 실로 이라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강조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이라크와 관련하여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것은 거짓 구체성의 유혹이다. “끔찍한 독재자가 타도되었다. 왜 그것이 나쁜 일이냐!” 혹은 좀더 정교한 판본으로는: “좋은 일을 하려고 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시도는 결국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마도 나쁜 목적(석유, 제국주의적 헤게모니)의 동기를 가졌지만 실제로 결과는 좋은 행위가 더 낫지 않겠는가?” 최근에 마이클 이그나티프Michael Ignatieff는 이렇게 썼다: “나에게 핵심적인 쟁점은 이라크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과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이 2천6백만 명의 이라크인들의 인권을 향상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겠는가? [전쟁에 대한] 반대가 언제나 나를 미치게 했던 것은 그것이 결코 이라크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권력을 놓고 벌이는 일종의 국민투표였다.” 폴 베르만Paul Berman 역시 동일한 요점을 말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부시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중동의 전체주의에 대한 전쟁이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들에 반대해서 다음과 같은 소박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그나티프와 베르만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의 동기가 “2천6백만 명의 이라크인들의 인권을 향상”하려는 욕망이라고 진정으로 믿는 것인가? 이라크인들의 삶의 향상이 사담 정권의 전복이 가져온 환영할 만한 “부수피해collateral damage”일 수는 있겠으나, 그 어떠한 진지한 분석이라도 이라크에 대한 공격의 세계적 맥락을, 이 공격에 의해 예시되고 부과된 국제적 삶의 새로운 규칙들을 스스로 망각할 수 있겠는가? 사담에 대한 그 어떤 동정심이나 그 어떤 추상적 평화주의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서유럽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도록 추동한 것이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낳은 인기 영웅 가운데 한 명은, 분명, 불운한 이라크의 공보장관 모하메드 사에드 알 사하프이다. 그는 매일 있었던 기자 회견에서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들마저도 영웅적으로 부인하면서 이라크 입장을 견지했다. 미국 탱크가 그의 관저에서 수백 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을 때도 그는 미국의 TV에 나오는 바그다드 거리의 탱크 장면은 할리우드 특수효과에 불과하다고 계속 주장했다. 과도하게 익살맞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는 “정상적” 보도의 숨은 진리를 드러냈다. 그의 논평에는 아무런 세련된 비비꼬기도 없었으며, 단지 순전한 부인만이 있었다. 그의 개입들에는 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해방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사실들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그리하여 사실들의 불유쾌한 측면들을 빙빙 돌려 말해야 할 필요로부터 해방된 투쟁을 드러냈다. 그의 자세는 “당신은 누구를 믿지? 당신의 눈인가 아니면 내 말인가?”의 자세였다. 더구나 때때로 그는 불현듯 기묘한 진리를 내뱉기도 했다. 예컨대 미국이 바그다드의 일부를 통제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그들은 그 어떤 것도 통제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한다!”
 
왜 아니겠는가? 2003년 3월 도널드 럼스펠드는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은 아마추어 철학자다운 이야기를 했다. “알려진 알려진 것들known knowns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들known unknowns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알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unknown unknowns이 있다. 즉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잊지 말고 덧붙여야 하는 것은 결정적인 네 번째 항목이다.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unknown knowns”, 즉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들. 이는 바로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다. 라캉은 이를 “그 자신을 알지 못하는 앎”이라고 말하곤 했다. 럼스펠드가 이라크와의 대결에서 주요한 위험은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즉 무엇인지를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사담으로부터의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해 우리는 오히려 주요한 위험은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이라고, 즉 우리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지조차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들과 가정들이라고 답해야 한다. 이 부인된 믿음들과 가정들―미국인(미국의 정치 엘리트)이 바로 그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통제하지 못하는 그 무엇―은 이 책의 궁극적 주제이다.
 
■ 역자 후기
 
올해 1월 초 지젝은 “이라크의 빌려온 항아리(The Iraqi Borrowed Kettle)”라는 제목의 원고를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우리는 그 책의 영어본 출간 소식을 알고 있었고, 한국어본의 조속한 출간을 위해서 직접 원고를 보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는 조건 없이 원고를 보내주었고 우리는 이 책이 한국에서 4월경에 출간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젝과 “협약”했다.
 
우리는 이 원고가 가능한 한 빨리 번역되어 한국어로 출간되길 원했으며, 따라서 세 명이 함께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셋은 각각 한 장씩을(박대진은 1장을, 박제철은 3장을, 그리고 이성민은 서론과 2장을) 맡았으며,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도 원했던 과제를 두 달여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지젝은 이전에도 9.11테러나 이라크 전쟁에 관한 글들을 이런 저런 경로로 발표했었다. 실제로 그것들 가운데 이 책과 내용이 겹치는 것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이 책은 가장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 지젝 스스로 이야기하듯, 이 책에는 “직접적 인상들과 반응들”에 대한 기술이 빠져 있지 않으며, 또한 이에 대한 이론적 돌파들이 있다.
 
최근 지젝 스스로도 자기 반성적으로 언급했듯이 그가 제안하는 정치적 대안과 그에 따른 주체의 태도는 1980년대에서 현재까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변동을 겪었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를 눈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기세등등했던 1980년대 에 그의 작업은 전체주의를 지탱시키는 주체의 태도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때 그가 내린 결론은 서구식의 자유 민주주의는 최선은 아닐지라도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민주주의는 온갖 종류의 조작, 부패, 민중선동을 양산할 수 있다는 약점을 갖지만 지젝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불가능한 일이 선거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급진적 함의를 보았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자유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점차 세계화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들을 목도한 후 그는 민주주의 자체와 근본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는 세계가 더 이상의 적대도 없이 자유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유토피아로 하나되리라는 예언이었다. 그렇지만 기대와는 달리 종식된 기존의 체제상의 적대의 자리를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등의 갖가지 원리주의적 적대가 채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폭력 사태는 그 강도를 더해갔으며 결국 9.11이라는 대형 참사에까지 이르렀다. 이로부터 지젝은 상호연관된 두 가지 통찰을 제시한다. 이는 두 역사적 인물, 그리스도와 레닌과 직결되어 있다.
 
지젝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수난이 갖는 결정적인 함의는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의 절망적 탄식에 집약되어 있다. 그것은 아버지·신의 무능함을 힐책하는 것이자 그 자신의 고통의 무의미함을 수긍하는 것이다. 결국 수난을 통해 그리스도가 체현하는 것은 “큰 타자 내의 결여”에 대한, 곧 기존 체제는 궁극적인 그 어떤 보증도 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지젝은 오늘날 몰인간적이고 추상적인 세계적 자본주의와 행정 관리에 의해 지배되는 후-정치하에서 주체가 처한 무력한 상태를 바로 그런 수난과 동형적이라고 파악한다. 그런 상황하에서 주체는 한낱 미미한 생명체에 불과한 것, 혹은 아감벤의 이른바 호모 사체르(homo sacer)로 환원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이전에 취했던 민주주의 옹호 입장을 즉각 폐기한다. 민주주의의 형식, 특히 선거를 통해 불가능한 것이 공적으로 실현될 수도 있으리라는 그의 기대는 오판이었다는 것이다. 라클라우/무페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적대를 대항(정치적 경쟁의 규제된 게임)으로 번역하는 기제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 정의는 민주주의가 동시에 배제 기제로서도 작용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등의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을 인정하지만 민주주의적인 게임의 규칙을 거부하는 자들은 사회체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보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의 정치적 유효화이기는커녕 그것의 영속적인 배제일 뿐이다. 그것은 권력 변화의 가망성이 열려있다는 거짓 개방성에 의해 우리가 기존 관계를 영원히 견디도록 강요함으로써 절망적인 폐쇄성에 직면할 계기를 무한히 지연시킨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하라”는 정언명령을 도입하는 것은 이렇게 오늘날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교착상태를 근본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서이다. 레닌은 (각각 상이한 유형의 큰 타자를 함축하는) 두 가지 유형의 논변의 유혹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벗어났다. 그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숙 이후에 온다는 단계론적 필연성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정치적 고려와 다수의 인민이 진정 혁명을 선호하는가와 관련된 혁명에 대한 회의론이다. 레닌의 위대함은 그가 그런 논변들에 대해 여하한 또 다른 큰 타자를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고 큰 타자는, 궁극적인 보증은 없으며 단지 “행위해야 한다”고 응답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스도에서 레닌으로”라는 제스처는 분명 유토피아를 향한 충동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는 단순히 실제 삶을 추상한 이상적 사회도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무조건적 윤리적 명령으로서의 레비나스적 타자성도 아니다. 그것은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절박함의 문제이며, “가능한” 것의 매개변항들 내에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 생존의 문제로서 우리가 떠밀려 들어가게 되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 걸려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실재”라는 라캉적 개념에 대한 본연의 접근이다. 그것은 실재는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실재에 대한 왜상歪像적 조망만이 가능하며, 실재-사물 그 자체에 다다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불가능한 것은 진정 일어나며 이렇게 “일어난 불가능한 것”이 실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단지 기존의 상징적 좌표로는 그것을 자리매길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요컨대, 지젝이 단언하는 “그리스도에서 레닌으로”의 제스처는 이 책의 결미에서 그가 한 다음과 같은 말로 가장 잘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숭고한 (유토피아적) 전망을 힘껏 일상적 실천으로 번역해내는 일, 요컨대, 유토피아를 힘껏 실천하는 일.”
 
이 책의 각 장의 제목은 이 책에서 “이라크”와 “민주주의”와 “지배(구조)”가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날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항목들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다시 “그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전쟁이, 민주주의가, 그리고 지배구조의 변동 일반이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에 얽힌 긴급성은 바로 여기에 걸려 있다. 선거가 끝난 직후이며 파병이 기다리고 있는, 주인의 자리가 비어 있는 바로 이 유일무이한 시기는, 독서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좋았던 옛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어두운 골방에 홀로 등불을 켜고 책을 붙잡아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1. 나눌 수 없는 잔여

    셸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

    슬로베니아학파총서 9

    슬라보예 지젝 지음ㅣ이재환 옮김

    2010-10-28

    양장본ㅣ397쪽ㅣ150x218mm

    24,00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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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

    슬로베니아학파총서 8

    슬라보예 지젝 지음ㅣ이성민 옮김

    2007-02-25

    양장본ㅣ463쪽ㅣ150x218mm

    25,00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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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

    슬로베니아학파총서 7

    슬라보예 지젝 지음ㅣ김지훈+박제철+이성민 옮김

    2006-06-25

    양장본ㅣ410쪽ㅣ150x218mm

    20,00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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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정오의 그림자

    칸트와 라캉

    슬로베니아학파총서 6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ㅣ조창호 옮김

    2005-11-10

    양장본ㅣ270쪽ㅣ150x218mm

    15,00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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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까다로운 주체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

    슬로베니아학파총서 5

    슬라보예 지젝 지음ㅣ이성민 옮김

    2005-04-25

    양장본ㅣ654쪽ㅣ150x218mm

    28,00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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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실재의 윤리

    칸트와 라캉

    슬로베니아학파 총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ㅣ이성민 옮김

    2004-09-25

    양장본ㅣ398쪽ㅣ150x218mm

    18,00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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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라크

    잃어버린 항아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2004-04-30

    양장본ㅣ238쪽ㅣ150x218mm

    15,00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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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암흑지점

    초기 근대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2

    미란 보조비치 지음 | 이성민 옮김

    2004-02-20

    양장본ㅣ222쪽ㅣ150x218mm

    14,00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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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1

    레나타 살레클 지음 l 이성민 옮김

    2003-11-20

    양장본 l 292쪽 l 150x218mm

    16,00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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