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발행하며
“박금산의 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여성의 언어를 배워가는 남자 이야기”
박금산이 8년 만에 장편소설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말해 남자가 페미니즘의 세계를 대면하면서 부닥치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박 교수가 <제국의 ○○○>라는 책이 사법적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저자의 페이스북의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책을 둘러싼 논쟁을 살피다 보니 왜 그 책이 형사소송에까지 가게 되었는지 호기심이 생긴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저자가 부드러운 평화주의자와 온건한 페미니스트로 보였는데 막상 독서를 하게 되니 내용에 동의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박 교수는 ‘좋아요’를 누른 것을 후회하며 진지하게 위안부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 자신이 대학에서 가르친 제자 혜린이에게 책에서 읽은 개념들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본격적인 사건이 전개된다.
박 교수는 이미 졸업은 했지만 제자인 혜린에게 편하게 질문을 꺼내며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하지만 혜린은 박 교수의 말에서 강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그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갈등은 증폭되고 박 교수는 교수사회에서조차 궁지에 몰린다. 박 교수는 혜린에게 사과를 하지만 사과조차도 여전히 혜린이를 힘들게 만들기까지 한다.
박 교수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하나하나 점검해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언어(言語)에서 오는 문제로 파악하게 된다. <제국의 ○○○>에서도 자신과 혜린이 사이에서도 언어가 서로를 아프게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데 무단으로 그 영토에 침입하여 무의식적으로 유린하게 된다는 점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박 교수는 이렇게 외친다. “그래 알았어!”라고. 이제는 혜린이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본 것이다. 그러면서 페미니즘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혜린이를 기다리기로 하며 대단원에 이른다.
대강의 줄거리에서 보듯 소설 속의 주인공인 박 교수는 페미니즘 관점이 기껏해야 여성의 몸을 훑지 않고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쩔쩔매는 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수준인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주의적 인물이다. 그가 페미니즘의 세계와 본격 대면하면서 좌충우돌을 겪으며, 혜린이의 ‘눈을 똑바로 맞추고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뜻을 보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깨닫고, 여성의 언어를, 그 언어의 영토성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긍정적인 인물로 변화해 나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번 쯤 일독을 권할 만한 소설이다.
■ 지은이 소개
박금산 (지은이)
박금산의 본명은 박영준이다. 1972년 여수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0년대 한국 장편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중편소설 <공범>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소설집 ≪생일선물≫,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연작소설 ≪바디페인팅≫이 있다. 2009년∼2010년 ≪문학웹진ㆍ뿔≫에 장편소설 ≪고원을 달리는 비행기≫를 연재했다. 연구서로 ≪소설과 우연의 질서≫, ≪장편 미학의 주류와 속류≫, ≪한국 현대 작가와 불교≫(공저)가 있다.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직 중이다.
수상 : 2016년 오영수문학상
최근작 : <[큰글씨책] 남정현 중단편집>,<남정현 중단편집>,<AI가 쓴 소설> … 총 26종
■ 차례
<제국의 ○○○> 7
피해자와 희생자 58
세미나에서 만난 사람 108
추천서 한 장 170
할머니 완전 잘됐어요 222
영화를 두 번 봄 258
ㅣ작가의 말ㅣ 301
■ 본문에서
교수는 페이스북에 새 소식으로 올라온 글을 바라보았다.
P. 52~54
잠이 오지 않아서 페친들한테 하소연 삼아 올린다. 며칠 전 모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어떤 책을 읽고 왔다. 내게 매춘과 성노예에 대해 얘기했다. 신문에 나오는 유명한 책이다. 말 섞기 싫어서 안 읽은 척했다. 페미니즘이 남성에 의한 여성의 강간 공포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으므로, 한 나라에서 몇 초에 한 번씩 여성이 그런 끔찍한 폭행과 살인을 당하는지 우리는 통계를 가지고 있으니! 학대의 극단이었던 ‘위안부’ 문제는 폭력의 극단이고 무차별 학살, 제노사이드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 교수는 성담론을 지식상품으로 소비하는 남성의 우월의식에 빠져 ‘위안부’ 담론을 이야기했다. 여성인 내 앞에서 ‘강간’ 운운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 나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불쑥 나에게 남자친구와 몇 번 만나느냐고 물었다. 개……. 욕은 참아야겠죠? 나는 희롱당하는 느낌이었고 수치심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음부터는 용건 없이 만나자고 하지 말라고, 가이드라인을 따라 싫다는 의사 표현을 전달했다. 변호사를 만났다고 해야 확실해질 것 같아 변호사한테서 그렇게 하라고 들었다고 했다. 그 교수는 변호사라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
참기가 힘들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다음부터 메시지 하지 말라고 분명히 표현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행사하는 행동의 자유는 약자를 향한 폭력임을 그는 알지 못한다. 권력자가 가지는 부도덕한 자유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이 권력에 부여된 윤리이다. 권력자가 외치는 자유라는 말 역겹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을 고소할 것이다. 성적으로 대상화 된 경험, 치욕적이다. 이렇게 다짐해 놓지 않으면 내가 언제 또 취직자리 소개 같은 걸 바라면서 그의 메시지에 끌려 다니는 인간으로 변하게 될지 몰라서 페이스북에 남긴다. 공유 많이 해주삼. 봄밤인데! 페친 여러분 파이팅.
P. 58~59
이 싸가지를 어떻게 손보면 좋을까. 교수는 화가 치밀었다. 잘해주는 것을 허락을 받고 잘해줘야 한다고? 그게 성평등이라고? 흥. 졸업을 해서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교수는 혜린이를 싸가지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해보고 싶은 마음을 먹으면서도 손으로는 교육부 홈페이지와 청와대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자기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고 ‘성희롱’, ‘성폭력’이라고 입력했다. 검색 건수가 잡히지 않았다.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같은 식으로 검색했다. 검색 건수가 잡히지 않았다. 이번에는 트위터에 접속했다. 검색 건수가 잡히지 않았다.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P. 101~102
희생은 당하는 것이지 스스로 청하는 것이 아니다. 도의적으로 책임을 느끼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해줄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피해자를 희생자라고 부르면서 양심을 챙긴다. 피해자라고 부르면 가해자를 찾아서 처벌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희생자라고 부르고 나면 그런 책임이 사라진다. 가해 주체를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희생자라고 부르고 나면 사건이 종료된다. 희생자는 비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무고한 피해자에게 도의적으로만 보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희생자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희생자는 그 단어를 쓰는 사람에게만 자기만족과 자기위안을 주는 단어이다. 자기만족에 매몰된 사람은 당사자의 입장을 무시한다. 자기밖에 모른다.
교수는 자신이 ‘위안부’를 무의식적으로 희생자라고 부른 데에 그런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문제가 어떻게든 끝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담론을 지식 상품으로 향유하면서, 소비를 완료해서 진열장에 넣어두고 싶은, 사유화된 지식 상품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근원적으로 자기만족을 위해 희생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었다. 한 번도 피해자의 심장에 들어가려고 시도한 적이 없으면서 정의로운 척 ‘위안부’ 담론에 관심을 표명하는 지식인인 척했던 것이었다.
그는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실수를 만회할 방법을 생각했다. 좋은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후 이마를 침실 바닥에 댔다. 이마를 비볐다. ‘혜린아, 고맙다. 너를 통해 언어 하나를 배웠다.’
P. 215
혜린이가 말했다.
“대화가 조금만 길어지면 교수님은 베이스가 드러나요. 이상한 걸 못 느끼시죠. 그렇게 말하는 논리를 가진 것이 교수님의 포지션이에요.”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냐?”
“생리통, 출산을 얘기하시면서 약을 만들어주는 사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만 생각하잖아요. 그게 남자라고 박힌 거죠. 우월한 존재라고 박힌 거죠. 여성주체가 느끼는 고통이라는 걸 모르잖아요! 그 논리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 유치하지 않으세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거예요. 남성도 페미니즘을 잘 말할 수 있지만 교수님은 아니라는 거예요. 생리통을 이야기했더니 곧장 약을 말하잖아요. 저는 아픔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뜯어고쳐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정말. 제 말에 동의하고 인정한다면 먼저 고통을 생각하셔야 해요.”
혜린이는 바지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었다.
교수는 식은땀을 쭉 흘렸다.
■ 지은이의 말
소설은 끝나고 삶은 새로 시작된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내가 쓰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이 자꾸 잊혔다. 그래서 ‘이것은 소설이야’라고 되뇌었다.
교정지를 검토하면서도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이 잊히려 했다. 그래서 또 ‘이것은 소설이야’라고 다시 되뇌었다.
소설의 인물처럼 나는 남성이고, 교수이고, 소설가이다. 삶의 변화에 기여하고 일상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허구를 장착했다. 우리 시대에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허구인가.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고 싶다. 허구와 현실은 뺨이 닿을 만큼 가깝다. 잠깐 방심하면 나라고 오해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나는 이렇지 않다. 이것은 여전히 소설이다.
출판사와 약속한 기한이 있기에 아슬아슬한 마음을 이대로 떠나보낸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원고를 고치고 있을 것이고 인물이 변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변화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상담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학자, 비평가, 출판사 검토위원, 정신과 의사, 작가, 기자, 페이스북 친구, 진짜 친구, 정말 고마우신 분들이다. 지난 작품 <바디페인팅> 때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남을 다치게 할까봐 걱정하며 혼자 몰래 썼는데 이번에는 나를 확장하고 꺼내고 싶어서 읽고, 보고, 듣고, 묻고, 찾아다녔다.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모두 진심으로 응해주셨다.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큰 의견 차이 앞에서 당황했고, 작은 의견 차이 앞에서는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
어느 자리에서 농담으로 말했다. 이 책을 내기 전의 나와 이 책을 낸 후의 나는 다를 것이다. 친구들이 웃었다. 웃음 짓는 얼굴을 대하자 마음이 편했다. 내가 나에게 건네는 농담이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에 대해서만 농담을 만들 수 있다. 이 소설이 다루는 세계에서는? 농담이라니, 어림없다. 더 깊은 삶을 살아야 유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잘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