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발행하며
“1920년 9월 초, ‘나’는 D자카에 있는 카페 하쿠바이켄에서 아케치 고고로를 만난다. 그때 맞은편 헌책방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두 사람은 최초의 목격자가 되는데…….”
도서출판 b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중 아케치 고고로가 등장하는 작품만을 전 16권으로 집대성한 [아케치 고고로 사건수첩] 시리즈를 출간한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고스케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명탐정으로 일컬어지는 아케치 고고로는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동양 최초의 탐정 캐릭터이다.
1925년 「D자카 살인사건」에서 일개 서생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955년 「그림자남」에 이르기까지 에도가와 란포가 지속적으로 집필한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는 성인 독자들 뿐 아니라 어린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소년탐정단 시리즈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시대를 막론하고 일본 내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였다. 도서출판 b의 [아케치 고고로 사건수첩] 시리즈는 바로 그 유명한 아케치 고고로의 활약상을 사건 발생 순서에 따라 엮었다.
「살인론」, 「서양범죄 탐정담」등 평론가이자 번역가이며 추리작가인 고사카이 후보코의 말처럼 에도가와 란포는 「D자카 살인사건」을 통해 아케치 고고로라는 탐정을 창조함으로써 일본 탐정소설의 역사를 개척했다.
[아케치 고고로 사건수첩] 제 1권에는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탄생을 알리는 「D자카 살인사건」부터 「유령」, 「흑수단」, 「심리시험」, 「천장 위의 산책자」까지 다섯 편이 실려 있다. 이 다섯 편은 모두 1925년 한 해 동안 ≪신청년≫을 통해 발표되었는데 속임수 없는 트릭과 논리적인 추리와 같이 이지적인 탐정소설을 지향했던 초기 단편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케치 고고로가 등장한 첫 작품이자 에도가와 란포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 실제로 헌책방을 운영했던 단고자카를 배경으로 하는 「D자카 살인사건」은 일본의 개방적인 가옥구조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밀실살인을 다루고 있으며, 고학생이 수전노 노파를 살해한다는 설정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연상시키는 「심리시험」 에서는 「D자카 살인사건」에서 미처 쓰지 못했던 심리학적 연상진단법을 본격적으로 활용한다. 해외 범죄 실화에서 힌트를 얻은 「흑수단」에서는 데뷔작 「2전짜리 동전」에 이어 암호 추리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대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범죄에 매혹된 주인공의 범죄행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천장 위의 산책자」는 「심리시험」과 마찬가지로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도서추리(倒敍推理)이지만 아케치 고고로가 설파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범죄학과 명쾌한 추리는 명불허전이다.
■ 지은이 소개
•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1894~1965)
일본 미에(三重)현 출생.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郎).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에서 착안한 필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국내외 추리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영미계 탐정소설에 심취하였으며, 1923년 ≪신청년≫에 단편소설 「2전짜리 동전」을 발표함으로써 추리작가로 데뷔했다. 1925년 「D자카 살인사건」에서 첫선을 보인 탐정 아케치 고고로가 큰 인기를 얻자 꾸준히 그가 등장하는 소설을 집필했다. 본격추리소설 외에 괴기와 엽기, 에로티시즘, 환상성, 초자연성, 잔학성 등이 부각되는 작품들을 쓰는 한편, [소년탐정단] 시리즈 등도 꾸준히 발표하여 성인독자는 물론 어린독자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에도가와 란포가 평생에 걸쳐 쓴 작품들은 그 자체가 일본추리소설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창작 활동 외에도 평론 등을 통해 해외 추리소설을 일본에 소개하였으며, 일본탐정작가클럽을 창설하고 ‘에도가와 란포 상’을 만들어 신인작가를 발굴하는 등 일본 추리소설의 저변을 크게 확대시켰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그는 명실상부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서 칭송받고 있다.
• 이종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육공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전문사 과정)를 졸업했다. 영화전문지 ≪키노≫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90년대 한국, 그 욕망의 투사」(≪한국형 블록버스터,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일촉즉발 도래청년」(≪한국 뉴웨이브의 정치적 기억≫) 등의 글을 썼다.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번역학과(석사 과정)를 수료했다.
■ 차례
D자카 살인사건 7
유령 49
흑수단 71
심리시험 107
천장 위의 산책자 151
작가의 말 203
옮긴이의 말 227
작가 연보 231
■ 본문에서
최근 하쿠바이켄에서 알게 된 특이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아케치 고고로라고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상당히 괴짜인 데다가 머리가 좋아 보였고, 탐정소설을 좋아한다는 점이 무척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얼마 전에 그 헌책방 안주인이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두어 번 책을 샀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헌책방 안주인은 상당히 미인인 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이어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p. 10~11)
그 후 히라타 씨는 종종 쓰지도의 얼굴을 보았다. 어떤 때는 극장 복도에서, 어떤 때는 석양이 지는 공원에서, 어떤 때는 여행지의 번화한 거리에서, 어떤 때는 그의 집 문 앞에서 본 적도 있었다. 마지막 경우 그는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p. 60)
저도 범죄나 탐정이라면 웬만한 사람보다 관심이 많았고 「D자카 살인사건」에서 보셨듯이 때로는 아마추어 탐정 노릇을 자처할 정도의 치기도 있었습니다. 가능하면 전업 탐정과 겨뤄보겠다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더군요. 아예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까요. 경찰뿐 아니라 큰아버지에게도 직접 제보가 들어왔지만 과연 경찰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오늘까지의 성과만 보면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연스럽게 친구인 아케치 고고로가 떠올랐습니다. (p. 78)
후키야 세이치로가 어찌하여 지금부터 서술하게 될 무시무시한 악행을 저지르기로 결심했는지 그 동기는 자세히 모른다. 설사 안다고 해도 이 이야기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그가 거의 고학으로 대학에 다닌 것을 보면 학비가 절박했을 수도 있으리라. 그는 보기 드문 수재였을 뿐 아니라 상당한 노력파였다. 따라서 학비를 벌기 위해 시원찮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 시간을 빼앗겨 좋아하는 독서나 사색을 맘껏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작 그런 이유로 그토록 큰 죄를 지을 수 있을까. (p. 109)
“자네가 죽이지 않았을까? 엔도 군을.” 아케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이런 경우에는 그런 모습이 훨씬 섬뜩하죠―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곤란해 하는 사부로의 눈을 바짝 들여다보며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리듯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p. 198)
■ 옮긴이의 말
“에도가와 란포는 한국에서 그 명성에 비해 그다지 많이 읽히는 작가는 아니다.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과 폭넓은 작품세계에 비해 번역된 작품의 수가 많지 않고 제한적이기 때문인데, 그런 면에서 아직까지 한국 독자들은 에도가와 란포를 제대로 읽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기에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느 작품부터 읽어나가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에도가와 란포를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는 에도가와 란포를 읽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25년 「D자카 살인사건」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1955년 「그림자남」에 이르기까지 세월을 따라 아케치 고고로의 캐릭터 자체가 진화할 뿐 아니라 작풍 자체도 초기 단편시절의 본격추리물에서 벗어나 여러 요소들을 차용하며 다양하게 변형된다. 그렇기에 [아케치 고고로 사건수첩]은 에도가와 란포를 가장 손쉽게 즐기면서도 가장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 추천사
「D자카 살인사건」은 에도가와 란포의 초기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걸작이다. 나는 잡지 ≪신청년≫에서 이 작품을 처음 읽고 신선한 작풍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쓰모토 세이초
일본에서 뒤팽과 같은 탐정이 처음 등장한 것은 에도가와 란포의 「D자카 살인사건」에서다. 이 작품에 그 유명한 아케치 고고로가 나온다. -가라타니 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