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으로 인해 서양 문학사는 다시 씌어지고 있다”
1. 이 책의 소개
도서출판 b에서 장-바티스트 쿠쟁 드 그랭빌의 <최후의 인간>을 번역하여 출간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목인 <최후의 인간>을 되짚어 떠올리자면, 1816년 바이런은 시 「어둠」에서 세계의 종말과 관련해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 파국의 사회적, 도덕적 결과에 방점을 두고 최후의 인간을 묘사한 바 있다. 또한 동시대의 작가 메리 셸리는 1825년 장편소설 <최후의 인간>에서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인간을 통해 종말의 비전을 보여주었던 바가 있다.
우리는 서구 문학의 무대에서 최초로 ‘최후의 인간’이라는 형상의 등장을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서구 문학 최초로 ‘최후의 인간’이 탄생한 곳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공식적으로 최초의 ‘최후의 인간’ 창시자가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최후의 인간’이라는 제목을 단 미완의 원고를 남겨둔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인 전직 가톨릭 신부 장-바티스트-쿠쟁 드 그랭빌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저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던 <최후의 인간>은 1805년 작가 사후 곧바로 서문 없이 출판되었다가 1811년 샤를 노디에의 서문과 함께 재간행되었지만, 오랫동안 평단과 독자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죽음 이후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바로 이 작품이 바이런의 「어둠」과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그랭빌의 <최후의 인간>이 발간된 이듬해인 1806년 영국에서 <최후의 인간, 또는 오메가루스와 시데리아, 미래의 로맨스>라는 제목의 영어 작품이 익명으로 출간된다. 이 작품은 출간 직후부터 영국의 공공 도서관을 통해 유통되면서 수많은 모작과 패러디들을 만들어냈고, 바이런과 메리 셸리 같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낭만주의 문학 연구자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이들 작품 간의 관계가 밝혀진 것은 20세기 후반 SF 연구 분야에서 일어난 우연 덕분이다. 영국의 SF 연구자 I. F. 클라크가 1961년 출간한 <미래의 이야기>에서 작자 미상의 영어 텍스트를 인용했고, 프랑스의 SF 연구자 피에르 베르생이 1972년 자신의 저서 <유토피아, 기이한 여행, 과학소설의 백과사전>에서 그랭빌의 프랑스어 텍스트를 인용했는데, 평소 서로의 연구에 관심을 두던 차에 두 텍스트의 긴밀한 유사성을 알아본 것이다. 그 후 두 사람은 공동 연구를 통해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에 영감을 준 것으로 종종 인용되던 작자 미상의 1806년 영어 소설이 그랭빌이 프랑스어로 쓴 작품의 해적판 번역이었음을 밝혀냈다.
1970년대 들어서 그랭빌의 작품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작품 안에 담긴 SF적 요소들, 예컨대 천문학과의 관계, 다른 행성에서의 삶의 가능성, 미친 과학자의 비유, 미래의 테크놀로지, 그리고 무엇보다 인구가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킨 데서 비롯된 기후와 인구 재앙을 골자로 하는 세속적 아포칼립스 개념 등에 주목한 연구자들이 많아지면서 시기적으로 메리 셸리의 작품에 앞서는 이 작품에 SF 문학의 효시라는 명칭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811년판 서문에서 샤를 노디에는 <최후의 인간>이라는 작품에 대해 독자들이 무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낸다. “그랭빌 씨의 사망 직후 어떠한 서문 격의 글도 없이 잘 정렬되지 못한 종이에 인쇄되어 출간된 탓에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을 그저 시시한 소설로만 생각했고 그 결과 작품은 판단 능력이 없는 일군의 독자들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다른 이들은 이 작품에서 언뜻 아름다운 서사시의 밑그림을 알아보긴 했으나, 출간 당시의 상태로는 엄밀한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했다.” 그럼에도 그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그랭빌 씨는 나이 열여섯에 <최후의 인간>을 처음으로 구상했는데, 유감스러운 죽음이 그를 덮쳤던 무렵이 되어서야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출간된 판본은 그가 막 운문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던 작품의 위대하고 훌륭한 밑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끔찍한 파국이 문학에서 앗아가 버린,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던 위대한 인물로부터 남은 것 전부일 뿐이다.”
<최후의 인간>은 세상의 끝이라는 묵시록적 사건 앞에서 최후의 인간 오메가르가 행하는 선택의 순간을 극적으로 무대화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요구대로 불행한 인류의 역사를 끝내고 지구의 종말을 앞당길 것인가? 아니면 지구의 정령의 뜻에 따라 아내 시데리가 잉태한 아이를 낳음으로써 인류를 종속시키고 지구의 부활을 꿈꿀 것인가? 그랭빌의 작품은 독자들을 문학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최후의 인간’의 고뇌에 찬 결정의 순간으로 이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최후의 인간’ 또는 말하자면 세계의 종말이다. 그것은 시간의 끝에 이르러 소진되고 정죄 받았으나 자신의 선고에 반하여 살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이 지속되도록, 인간들이 여전히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구의 정령의 지고한 투쟁의 이야기다. 왜냐하면, 탁월한 시인이 말하듯, 이 지구상에 사랑할 수 있는 커플이 한 쌍이라도 남아 있는 한 지구는 끝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2. 지은이 / 옮긴이 소개
■ 지은이: 장-바티스트 쿠쟁 드 그랭빌(Jean-Baptiste Cousin de Grainville, 1746~1805)
프랑스 작가. 1746년 르아브르에서 태어나 1805년 아미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철학자이자 시인이요 사제였던 그랭빌은 무엇보다 그의 사후 출간된 작품 <최후의 인간>을 통해 세계의 종말을 목도한 최후의 인간의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SF문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다.
■ 옮긴이: 신정아+최용호
신정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17~18세기 라신과 그 작품 수용에 관한 사회 시학적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고등통번역학교(ESIT) 번역학부 한불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바로크>, <노랑신호등>(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프랑스 연극 미학>(공역), <번역가의 초상-남성 번역가 편>, <페드르와 이폴리트>, <신앙과 지식, 세기와 용서>(공역), <수전노 외> 등이 있다.
최용호: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시간 문제」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Le problème du temps chez Saussure, <언어와 시간>, <텍스트 의미론 강의>, <의미와 설화성>, <서사로 읽는 서사학>, <소쉬르는 이렇게 말했다>, <노랑 신호등>(공저), <이야기의 끈>(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언어학과 정신분석학>, <언어학과 기호학 사이>, <정념의 기호학>(공역), <신앙과 지식, 세기와 용서>(공역) 등이 있다.
3. 차례
ㅣ일러두기ㅣ 4
1811년 판본 서문 7
첫 번째 노래 15
두 번째 노래 37
세 번째 노래 60
네 번째 노래 91
다섯 번째 노래 127
여섯 번째 노래 151
일곱 번째 노래 183
여덟 번째 노래 204
아홉 번째 노래 222
열 번째 노래 244
ㅣ부록ㅣ교사 그랭빌, 그의 생애, 그의 시, 그의 죽음 268
ㅣ옮긴이 해제 및 후기ㅣ 319
4. 책 속에서
시인은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방법으로 그의 서사시를 구성하는 주제 제시부를 최후의 인간이 인류의 아버지, 즉 최초의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틀 속에 배치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내가 보기엔 그것 하나만으로도 서사시의 뮤즈가 불어넣을 가장 아름다운 구상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놀라운 발명인데, 그에 더해 그 도입부부터 상상력의 틀을 깨는 이 놀라운 우화가 최고로 자연스럽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경이라는 장르를 통해 쭉 유지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은 뭐라 말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저자가 밝은 곳에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이 습작에서 매 페이지마다 가장 탁월한 표현들, 가장 뛰어난 비교들, 가장 완성된 묘사들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뭐라 말하겠는가? (1811년 판본 서문, 11쪽)
나는 내가 불멸의 존재라고 믿었다. 마침내 이러한 환상이 깨져야 할 때가 왔구나. 오늘날 인간종을 영속시킬 수 있는 사람은 너와 단 한 명의 여인밖에는 없다. 그녀가 소멸하거나 네가 죽는다면 지구는 해체되어 카오스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43쪽)
노르망디 지방의 수도는 오랫동안 비행선이 출발했던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였습니다. (…) 벌써 항아리에 들었던 가벼운 공기들이 비행선 옆구리로 쏟아져 들어갔고, 비행선은 공중으로 치솟고 싶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출렁거렸습니다. (…) 비행선의 선미에는 <나는 세계 일주를 했다>라는 문장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 이쪽 편에는 대담한 항해사들이 하늘길을 통해 남반구의 바다를 건너 사람이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은 해변들과 접근 불가능한 산에 내려가 세계의 정복을 완성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 가운데 부분에는 전쟁 중인 무장 비행선 군단에 의해 하늘이 가려진 것이 보였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57~58쪽)
그는 환희에 차서 자신의 비밀을 공개할 준비를 했습니다. (…) 그때 한 가지 의혹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어 계획을 중지시켰습니다. (…) 그는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두고, 인간들과의 교류를 모두 끊은 채 자연의 힘을 계산했습니다. 사람들 말로는 이 일을 마치고 나서 그는 창조주 앞에 엎드려 인간의 목숨에 이렇게 짧은 한계를 둔 것에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 만일 이러한 질서가 어지럽혀지고, 인간들이 그들의 젊음을 배가하게 된다면, 지구는 더 이상 오로지 생존을 위해 서로의 멱을 따고 말게 될, 너무 많은 인간의 자식을 품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말입니다. (세 번째 노래, 70~71쪽)
이다마스가 시데리 앞에서 나를 멈추게 하고, 그녀가 소심한 부끄러움 때문에 계속 낮추고 있던 눈을 들어 나를 본 순간,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고 몸을 휘청하더니 혼절하여 쓰러집니다. 나 역시도 감히 내 감각이 전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발치로 달려갑니다. 너무나 흥분해서 사실 그 순간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데리가 내게서 매일 자기를 따라다녔던 청년을 다시 봤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나 역시도 이 아메리카 소녀에게서 자연의 여신이 그려줬던 그 초상화의 주인공을 알아봤던 겁니다. (네 번째 노래, 122쪽)
“유럽인들이여, 그대들은 속았다. 하늘이 이 혼인을 반대하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한 나는 이 혼인을 파기한다. 오메가르를 시데리로부터 떨어뜨려 놓아라. 그가 감히 아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 한다면 그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오르뮈스가 나를 향해 말을 합니다. “그렇다. 그대는 끔찍한 종족의 아비가 될 것이다. 그대의 후손들은 혹독한 배고픔을 무기 삼아 전쟁을 일으켜 서로 잡아먹을 것이고, 모든 잔혹한 범죄를 명할 필요 외에는 다른 신을 알지 못할 것이다. 어서 오메가르를 시데리로부터 떼어내지 못할까.” (다섯 번째 노래, 147쪽)
“하늘이 그녀의 죽음을 바랍니까?” 격한 어조로 오메가르가 되묻는다. 아담이 대답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오. 나의 입을 통해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신이, 인간의 날들을 자기 뜻대로 처분할 수 있는 신이 그녀가 사멸하기를 바라오.” (일곱 번째 노래, 185쪽)
“오, 죽음이여! 당신의 의도가 무엇이오? 당신이 지금 희생시키려는 사람이 그녀라오. 당신 눈이 알아보지 못한 시데리란 말이오.” 죽음이 환희에 차서 말한다. “그녀로군. 내가 당신 눈앞에서 기꺼이 희생시킬 사람이 시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참으로 기쁘오.” “뭐라고!” 정령이 절망적으로 부르짖는다. “당신의 맹세를 잊었소?” 죽음이 대답한다. “난 시데리가 마음속에서 사랑의 불꽃을 지피는 한 살려두겠다고 맹세를 했었지, 그저 형벌일 뿐인 목숨을 끊어주기만을 바라는 죽어가는 시데리를 살려두겠다고 약속한 적은 결코 없소.” 죽음이 덧붙인다. “이쪽으로 오시오. 이리 와서 죽어가는 여인으로부터 배우도록 하시오. 이 교훈은 당신에게 무용하지 않을 거요.” (열 번째 노래, 261쪽)
5. 옮긴이의 말
하마터면 이 아름답고도 처연한 지구 종말의 이야기가 밖으로 나와 전해지지 못하고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묻힐 뻔했다. 샤를 노디에나 쥘 미슐레가 전하는 작품의 수용사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 사후에 어렵사리 출판되어 초판 판매가 겨우 서너 권에 불과했던 이 책이 이백 년이란 시간을 넘어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오늘 여기 한국의 독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 거의 기적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우리 역자들이 그랭빌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의 저작 <최후의 인간>을 발견하게 된 것도 많은 부분 우연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모든 우연이 다 필연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때로 어떤 우연은 한 사람의 소명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의 역자들에겐 그랭빌과의 만남이 꼭 그랬다. 종교와 혁명 사이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몰아치는 온갖 세파에 맞서 고귀함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쳤지만 끝내 가난과 모욕과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야기꾼 그랭빌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 즉 <최후의 인간>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전승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