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소개
• 명탐정 쓰쿠모주쿠의 파란만장한 모험담
도서출판 b에서 출간하는 <비판세계문학>의 두 번째 작품인 일본 작가 마이조 오타로(舞城王太郎)의 장편소설 『쓰쿠모주쿠』(원제:九十九十九)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지나치게 아름답게 생긴 탓에 얼굴만 보여도 남들을 기절시켜버리는 명탐정 쓰쿠모주쿠가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가 기상천외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동시에, 그 과정이 이야기 스스로를 해체하고 재건하는 결과를 낳는 메타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대중과 함께 문학성을 동시에 획득한 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쓰쿠모주쿠』는 모두 일곱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5화와 7화는 각각 4화와 6화의 앞에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다음 이야기에 이르러 앞의 이야기를 대상화하고 부정하는 일종의 액자식 구조를 이룬다.
• 사상 초유의 메타미스터리
이 소설은 원래 일본의 유명 미스터리 작가 세이료인 류스이에 대한 헌정 시리즈 중 한 권으로 기획된 것이다. ‘쓰쿠모주쿠’ 또한 세이료인 류스이의 작품 속 인물인데, 마이조 오타로의 『쓰쿠모주쿠』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포섭된 쓰쿠모주쿠는 창세기와 요한 묵시록을 모방한 살인사건들을 해결해나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이료인의 작품을 비평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명탐정’, ‘모방 살인’, ‘미스터리’, 작중 인물의 ‘성장’, 그리고 ‘문학’ 등의 개념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며 자기 세계의 지반을 넓혀나간다. 이 작품이 메타소설의 형식으로 쓰인 것도 그러한 비평적인 성격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이야기의 시간 축까지 뒤틀어 궁극의 메타기법을 선보인다.
•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실존 문학
드디어 미스터리의 ‘진상’, 그리고 인생의 ‘진상’에 다가서나 싶다가도 사실 그 ‘진상’이랑 애당초 없었던 것이라는 전개가 되풀이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 쓰쿠모주쿠는 결코 절망하는 법 없이 이야기의 ‘바깥’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의 연쇄 속에 쏟아지는 말과 의미의 홍수 속에서 어떠한 말과 의미를 받아들이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명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이 작품을 두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실존 문학’이라며 극찬한 바 있다. 또한 그 번민의 과정을 속도감 넘치는 문체로 에로틱하게,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난센스하게 그려냈다는 점에 소설 쓰쿠모주쿠의 참신함과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지은이 소개
• 마이조 오타로 (舞城王太郎)
1973년 일본 후쿠이 현 출생. 2001년 『연기, 흙 혹은 먹이』로 제19회 메피스토 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2003년 제16회 미시마 유키오 상을 수상한 『아수라 걸』을 비롯하여 『세계는 밀실로 되어 있다』,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정말 사랑해』, 『디스코탐정 수요일』, 『JORGE JOESTAR』 등이 있다. ‘마이조 오타로’라는 이름은 필명으로, 본명뿐만 아니라 신상 및 기타 이력을 철저히 비밀에 붙여 신비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자신의 소설 속 일러스트는 거의 대부분 그가 직접 그리고 있으며,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게임 등의 영상 작품을 기획․제작․판매하는 창작 집단 REALCOFFEE에 소속되어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 최혜수
고려대학교 통계학과 졸업.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다자이 오사무 전집> 중 『사랑과 미에 대하여』, 『정의와 미소』, 『쓰가루』, 『사양』과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다카하시 도시오의 『호러국가 일본』(공역) 등이 있다.
■ 차 례
제1화 7
제2화 93
제3화 149
제5화 209
제4화 269
제7화 331
제6화 407
| 작품 해설 | 이야기를 어떻게 이길까?․473
옮긴이 후기․485
■ 책 속에서
산도(産道)를 지나 밖으로 나온 내가 감동한 나머지 ‘호오나~♪’ 하고 노래하자 나를 안고 있던 간호사와 의사가 실신해서, 나는 탯줄 하나에 매달려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엄마를 포함한 모두가 잠시 정신을 잃었고, 나는 30여 분간 거기서 그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에, 내가 경험한 최초의 세계에는 위아래도 없었고 좌우도 없었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내 노랫소리뿐이었다. (본문 9쪽)
“아니. 그런 게 아냐. 나는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에미코는 테이블 위의 「제1화」와 「제2화」를 바닥에 집어던진다. 자방! 하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 위에 원고가 펼쳐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이랑, 내가 살면서 생활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명확히 구분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뭐가 진짜고 뭐가 거짓인지 모른다든지, 그런 게 없었으면 한다고!” 그런 뒤에 신문도 집어 들더니 바닥에 패대기친다.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현실에서 일어나다니 정말 기분 나빠! 이런 거, 정말 어떻게 좀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 그런 뒤 에미코는, 세이료인 류스이의 고단샤 노블스 여섯 권을 팔로 밀어 테이블 밑으로 떨어뜨린다. “이 말도 안 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설도, 내 생활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 정말 기분 나빠—! 아! 진짜로 죽어줬으면 좋겠어. 이 세이료인 류스이.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 응? 쓰토무 머리 좋으니까 할 수 있잖아? 이 세이료인 류스이, 찾아서 잡아 죽여줘. 제발. 이 현실과 여러 가지 거짓말들도 제대로 구별해주고.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확실히 해줘. 제발. 쓰토무라면 할 수 있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모른다, 같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았어.” 하고 나는 말한다.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확실히 할게. ≪세이료인 류스이≫도 잡아서 뜨거운 맛을 보여줄게. 그런데 고단샤 노블스의 ≪세이료인 류스이≫는 어떻게 하지? 만약에 이 「제1화」, 「제2화」랑 상관이 없다면.”
“아무래도 좋아. 진짜로 관계가 없다면, 그냥 가만두면 돼. 내가 죽여줬으면 하는 건, 우리 집에 말도 안 되는 소설을 보낸 ≪세이료인 류스이≫야. 그 자식은 찾아서 잡아 죽여.”(본문 168~169쪽)
정말로 특권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죽음을 맞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죽는 것이다. 위엄. 존경.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잃었다는 것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 안타까워해주는 것. 좀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주는 것. 좋은 추억. 만족감. 자신. 좋은 인생을 보냈다는 자부심. 이렇게 죽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죽음을 맞는 기쁨.
추리소설 속의 죽음에 그런 것은 없다.
추리소설이 대전大戰 중의 대규모 죽음을 경험하며 발달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그러면서 없어진 인간의 죽음이 갖는 존엄성을 추리소설가가 회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잘 이용한 탓일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 갖는 존엄성이 없어짐으로써, 추리소설가는 등장인물을 죽이기 쉬워졌고, 상처를 주기 쉬워졌으며, 장난감으로 삼기 쉬워졌다는 것이다. 당돌한 살의와 황당무계한 동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죽음을 접하는 등장인물의 심리상황도 가벼이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죽음이 갖는 존엄성이라는 것에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추리소설 속에서 본래의 특권적 죽음이 그려질 가능성은, 그 이야기 속 사망자가 타살인 척하면서 자살을 시도하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도 ≪명탐정≫이 등장해버리면 불가능해지고 실패하겠지만. (본문 219~220쪽)
태초에 말이 있었다. 말은 신과 함께 있었다. 말은 신이었다. 요한복음서의 이 말이 옳다면, ≪쓰쿠모주쿠≫는 그야말로 신의 이름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이름이겠지.
하지만 나는, 신인 걸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본문 467~468쪽)
■ 지은이의 말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독특한 작풍의 소설가인 마이조 오타로의 쓰쿠모주쿠는 사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평범한 사람보다는 원래 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하나의 특정한 세계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세계든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거대한 우주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주의 존재를 모른다면, 어쩌면 이 작품은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를 포함한 우리에게, 이 세상에 그냥 단순한 말장난이라는 게 있을까? 어떤 말이든, 그것은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인생이자 세계이다. 심지어 마이조 오타로는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다른 이야기나 캐릭터들, 심지어 자신이 쓴 전작의 등장인물과 내용들까지 온갖 ‘말’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여 소설가로서의 자기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설가이니, 그에게 말이란 곧 세계이다. 그런 세계관을 지닌 그는 이야기와 더불어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자신의 태도를 언급하는, 한마디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쓴다. 그런 면에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소위 ‘초(超)메타소설’인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작풍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옮긴이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