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문학사에 ‘노인문학’, ‘노인시’의 출현”
1. 이 책을 발행하며
바야흐로 노인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시대다. 누구나 100세 시대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인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는 현상은 지역적 차이는 있지만 세계적 추세다. 인류의 의학의 발달과 경제적 부의 증진 결과일 것이다. 장수 시대는 분명 축복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미처 준비되지 않은 여러 과제들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인 ‘문제’라는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말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축복이자 문제’인 인구 고령화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은 이러한 노인 고령화 현상과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을까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고 하겠다. 시와 소설을 막론하고 노인이 중심으로 그려진 작품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때에 하종오 시인은 “한국 시단에 노시인이 적지 않은데도 노인에 관한 시가 별반 없다. 노시인이 왜 노인을 시의 주체, 시의 주제로 시를 쓰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한국 문단에 던지는 질문이자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일 터인데, 시인은 시집 <노인류>로서 그 실천적, 문학적 대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70대에 접어든 하종오 시인의 마흔세 번째 시집 <노인류>는 그러한 의미에서 충분히 주목받아 마땅할 것이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노 인류(老 人類, 늙은 사람들)’와 ‘노인 류(老人 類, 노인의 무리)’라는 이 중의적 표현으로서의 ‘노인류’는 “고령 사회를 살아가는 노인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세태에서 그 노인들만 인류로 특정화하기 위하여 만든 조어”이다.
흔히 리얼리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시인답게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빠르고 정확하고 능란하게 작품화하고 있는데 고령화 사회의 현상과 문제를 한 권의 시집에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대도시에서 청장년 시기를 보내고 난 노인들의 모습과 시골에서 삶을 마무리하려는 노인들의 몸짓에 주목한다. 이것이 자기 내부의 시적 감각과 정서가 자기 외부의 현실적 다단함과 변동성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데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파고들어서 이색적이며 매력적인 시로 씌어졌다.
하종오 시인은 노인류가 “지혜롭다고 자긍하고 궁상맞다고 자탄하고 간교하다고 자조하는 특성”(「노인류의 출현」)을 지녔다고 말한다. 고령화하는 인류의 중요한 한 중심체로서 인간의 문제를 내재하거나 노출하는 노인들을 ‘노인류’로 지칭하고는 그 정체성을 그렇게 과감하게 적시하여 표현함으로써 노인들의 순정성과 양면성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홍승진은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없었던, 고령사회에 매우 절실한 ‘노인문학’ ‘노인시’라는 특별한 장르, 어쩌면 기존의 문학과 시와는 달리 ‘고령자문학’, ‘고령자시’로 특화된 분류를 해야 할지도 모를 전복적 장르가 한국 현대시에 출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시들이지 않은가.”라고 추천사에 쓰고 있다.
다음의 시구는 인생을 충분히 경험해 본 자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숙고해 본 자의 시적 인식이 아닐까. 경외롭기까지 하다.
“살아 있으면 늙는데 늙어서 살아 있어야 하는가?”/한 노인이 이 화두에 사로잡혀 있었다 / 다른 노인이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면 노인일 수 있는가?”(「노인류의 지혜」) 부분
2. 지은이 소개
하종오 시인.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넋이야 넋이로다>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정>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어미와 참꽃> <깨끗한 그리움> <님 시편> <쥐똥나무 울타리> <사물의 운명> <님> <무언가 찾아올 적엔> <반대쪽 천국> <님 시집>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제국(諸國 또는 帝國)> <남북상징어사전> <님 시학> <신북한학> <남북주민보고서> <세계의 시간> <신강화학파> <초저녁> <국경 없는 농장> <신강화학파 12분파> <웃음과 울음의 순서> <겨울 촛불집회 준비물에 관한 상상>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신강화학파 33인> <제주 예멘> <돈이라는 문제> <죽은 시인의 사회> <세계적 대유행> <악질가>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세 개의 주제와 일흔일곱 개의 서정> <어떤 문장으로부터의 명상> 등이 있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5
노인류의 출현 10
노인류의 신생 12
노인류의 인사 14
노인류의 진화 16
노인류의 주경야독 18
노인류의 식욕과 물욕 20
노인류의 도달점 22
노인류의 정체성 24
노인류의 전성기 26
노인류의 앞뒤 모습 28
노인류의 복장 30
노인류의 세간살이 32
노인류의 동년배 34
노인류의 포옹 36
노인류의 콧대 38
노인류의 식사 40
노인류의 참회록 42
노인류의 궁상 44
노인류의 간교 46
노인류의 회귀 48
노인류의 수다 50
노인류의 빈부 52
노인류의 밤비 54
노인류의 유산 56
노인류의 결여 58
노인류의 불평불만 60
노인류의 행불행 63
노인류의 회억 66
노인류의 유전 69
노인류의 실랑이 70
노인류의 감들 72
노인류의 노추 74
노인류의 교훈 76
노인류의 일머리 78
노인류의 무관심 80
노인류의 선택지 82
노인류의 호불호 84
노인류의 핑곗거리 86
노인류의 헛꿈 88
노인류의 반면교사 90
노인류의 재생 92
노인류의 양면성 94
노인류의 결락 96
노인류의 친불친 98
노인류의 강약약강 100
노인류의 골병 102
노인류의 헛나이 104
노인류의 지혜 106
노인류의 종언 108
노인류의 종시 110
4. 본문에서
<노인류의 출현>
Ⅰ
늙은 내가 늙은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죽기 전에 한번 보자.”
늙은 친구한테서 늙은 내게로 문자가 왔다
“안 보고 죽어도 괜찮다.”
Ⅱ
인류의 오래된 희망은
서로 대면하고 대화하고 동행하는 것이고
인류의 오래된 염원은
함께 식사하고 덕담하고 축원하는 것인데
그런 희망을 없앤 나와 친구를
그런 염원을 없앤 나와 친구를
노인류로 규정한다
그리고 노인류는 지혜롭다고 자긍하고 궁상맞다고 자탄하고 간교하다고 자조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말하겠다
죽기 전에 친구를 보고 싶어 하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친구에겐
희망도 염원도 있다고 할 수 없어
친구를 노인류로 새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달리 이해하고 배려하고 설명할 개념어가 없다
죽기 전에 나를 안 보고 싶어 하는 친구를 서운해 하지 않는 나에겐
희망도 염원도 있다고 할 수 없어
나를 노인류로 새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달리 이해하고 배려하고 설명할 개념어가 없다
이제 나와 친구는 노인류이다
늙어서 친구를 보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과
늙어서 나를 안 보고 싶어 하는 친구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이 지혜롭다고 자긍하고 궁상맞다고 자탄하고 간교하다고 자조하는 노인류의 특성이다
* * * * * *
<노인류의 유산>
Ⅰ
“날이 갈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
겨우 먹고사는 한 노인이 탄식했다
“가난하지 않을 방법이 있나?”
겨우 먹고사는 다른 노인이 반문했다
Ⅱ
노인류가 되면 가족을 위한
부동산이나 귀금속이나 현금 따위
개인 사유 재산은 없어도
하늘과 햇빛과 비바람 따위
인류 공동 재산은 있어
자족할 수 있다
노인류의 재산 목록엔
공기와 달빛과 별빛과 구름과 그늘도 들어 있지만
더 쓸 능력이 없고
덜 쓸 시간이 없고
다 쓸 장소가 없다
노인류가 되면 부모 자식 간에
애써 부동산이나 귀금속이나 현금 따위를
상속하지 않아도
이미 하늘과 햇빛과 비바람 따위를
공유하고 있어
더 부유하지도 않고
덜 빈곤하지도 않고
다 부족하지도 않다
유산이 없는 노인류는 없다
* * * * * *
<노인류의 종언>
Ⅰ
늙은 내가 늙은 아내에게 말했다
“난 병들면 안락사하고 싶어!”
늙은 아내가 늙은 나에게 말했다
“난 잠자다가 돌연사하고 싶어!”
Ⅱ
사람들이란 죽은 후에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죽음이 이미 사람들에게 와서
사람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노인류도 없다
사람들이란 죽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
죽음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지 않아서
사람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그대로 있으므로
노인류도 있다
노인류인 내가 안락사하기를 바라는 것과
노인류인 아내가 돌연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살아 있는 순간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순간부터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일생에 걸쳐서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서
노인류가 시작하고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노인류가 종언하는
그 사이를
나와 아내는 사람으로 이제 다 지나왔다
5. 시인의 말
‘노인류(老人類)’는 고령 사회를 살아가는 노인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세태에서 그 노인들만 인류로 특정화하기 위하여 만든 조어다. ‘노 인류(老 人類, 늙은 사람들)’와 ‘노인 류(老人 類, 노인의 무리)’라는 뜻도 포함된 이 조어는 현재 사회와 미래 사회에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관여하는 노인들을 지칭한다.
나 자신이 속한 그들을 시화(詩化)하려고 했으며 한국의 수많은 고령층 시인들이 노인류의 창조적인 장에서 존재하기를 희망한다. 한국 시단에 노시인이 적지 않은데도 노인에 관한 시가 별반 없다. 노시인이 왜 노인을 시의 주체, 시의 주제로 시를 쓰지 않는가? 노인에 관한 노시인의 시작(詩作)은 너무나 당연하고 합당한 창작 행위가 아닌가? 노시인들 각자의 경험과 인생을 형상화한 노인 시편을 기다린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습작하기 시작하여 노년 시절까지 쓰고도 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고, 마침내 인지력이 떨어지는 노인이 되었다. 시를 쓰려고 골라낸 낱말이 내가 알고 있는 뜻에 맞는지 의문이 들어 사전을 뒤적이고, 그동안 알고 있던 명제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 사물이나 상황을 보면서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를 발견한다.
아무려나 아직은 시를 쓸 수 있는 노인의 날들이어서 다행이라며 자긍하는 시간과 불행하다고 후회하는 시간을 번갈아 보내고 있다. 노인의 날들이 초년 중년의 날들에 비교해도 그리 짧지 않다는 것이 때로는 징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축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자성하거나 회오하거나 수긍하며 살아갈 날들로는 노년이 짧다는 생각도 길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나의 생에 시를 더는 쓸 수 없는 시간이 온다면 안락사를 허용하는 곳으로 가서 죽기를 소망한다. 이 자술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6. 추천사
노인이 된 하종오 시인이 드디어 노인에 관한 시를 썼다. 한국 현대시에 노인을 시적 주체나 대상으로 하여 인간의 문제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시가 있었던가. 하종오 시집 <노인류>에는 그것을 오롯이 담아낸 다양하고 다채로운 주제와 소재로 가득하다. 이 시들은 특히 대도시에서 청장년 시기를 보내고 난 노인들의 모습과 시골에서 삶을 마무리하려는 노인들의 몸짓에 주목한다. 이것이 자기 내부의 시적 감각과 정서가 자기 외부의 현실적 다단함과 변동성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데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파고들어서 이색적이며 매력적인 시로 씌어졌다. 시인은 “노인류는 지혜롭다고 자긍하고 궁상맞다고 자탄하고 간교하다고 자조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말”(「노인류의 출현」)한다. 작금 고령화하는 인류의 중요한 한 중심체로서 인간의 문제를 내재하거나 노출하는 노인들을 ‘노인류’로 지칭하고는 그 정체성을 그렇게 과감하게 적시하여 표현함으로써 노인들의 순정성과 양면성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그러함에도 자긍과 자탄과 자조라는 내적 시심(詩心)이 외적 현실의 위력에 오래 시달린 삶의 지혜로움과 궁상맞음과 간교함을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한국 현대시문학사는 하종오 시집 <노인류>로 인하여 노인을 시적 주체나 대상으로 한 새로운 시를 적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없었던, 고령사회에 매우 절실한 ‘노인문학’ ‘노인시’라는 특별한 장르, 어쩌면 기존의 문학과 시와는 달리 ‘고령자문학’, ‘고령자시’로 특화된 분류를 해야 할지도 모를 전복적 장르가 한국 현대시에 출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시들이지 않은가. 지금 노인(혹은 고령자) 세대는 물론이거니와 세월의 순서대로 노인(혹은 고령자)이 될 전 세대가 하종오 시집 노인류를 읽게 되면 오늘날의 자기 삶을 진지하게 직시하고 진정하게 해석하고 진실하게 정의하게 될 것이다. -홍승진(서울대 국문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