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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소개된 b

2021.10.12 00:36

한겨레신문 | A에 각 세운 b의 대안세상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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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획 역량은 충분하다. 그걸 밀고나갈 힘이 달릴 뿐.” 출판경험 전혀 없던 기계기술자 출신 조기조 대표는 직원들, 전문 기획위원들과 의기투합해 어려움 속에서도 도서출판b를 잘 이끌고 있다. 왼쪽부터 이신철 위원, 김장미 관리팀장, 조 대표, 백은주 편집장, 이석환 편집자.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서울 관악구 신림11동에 있는 ‘도서출판b’에 가서 ‘b’가 무얼 의미하느냐는 질문부터 했다. 조기조(50) 대표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개념어인 상징계의 제3자를 가리키는 “‘대문자 타자A’에 대립되는 그 무엇 정도”라고 대답을 해 놓고는, “실은 그보다는 우리는 b급 출판사라는 뜻”이라며 웃었다.

 

중량감 있는 인문·사회과학 양서들을 꾸준히 출판해온 도서출판b는 2003년 2월 조 대표와 지금 기획위원인, 미학 전공자로 정신분석 쪽에 관심이 깊은 이성민 두 사람이 “각각 300만원씩 내서 보증금 300만원짜리 셋방에 집에서 들고 간 집기들 놓고 시작”했다. 그때 슬라보이 지제크를 축으로 한 ‘슬로베니아 학파’의 헤겔, 마르크스, 라캉 기반의 비판이론들을 소개하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b’라는 착상이 나왔고 그게 곧 도서출판b의 출판 방향이나 이념의 상징어가 된 셈이다.

 

충남 서천군 출신인 조 대표는 장항공고 졸업 뒤 인천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했고 구로공단 인근 기계공장들에서 공장자동화기계 설계 등의 작업을 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공장들이 도산한 뒤 5년을 ‘백수’로 보냈다. 그때 나간 공부모임에서 이 위원을 만나 의기투합했다. 그는 원래 <낡은 기계> <기름미 인> 등의 시집을 낸 노동시인이요 책벌레다. 1980~90년대 구로공단 일대 문화운동에도 가담했다. 지금 편집장으로 있는 이가 그때 함께 운동을 한 백은주씨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두 75종의 책을 냈다. 그중에서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가 10여권. 이 가운데 지제크의 <까다로운 주체>가 가장 많이 나갔다. 지금까지 2400권 정도. 도서출판b의 책들은 일반적인 베스트셀러 개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조 대표는 “권당 평균 1500부 정도 나간다”며 “우리 출판사 책 고정독자들이 1000명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본적으로 1000부 정도는 다 나간다. 그 덕에 한달에 한권 정도는 계속 책을 낼 수 있다. 처음엔 연간 서너권밖에 못 냈지만 지금은 그래도 열댓권씩 낸다.”

 

노동시인과 문화운동가 의기투합

지제크와 가라타니 책이 두 기둥

기획위원 중심 총서시스템에 강점

 

이 출판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기획이 일본의 비평가요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 번역서들이다. ‘가라타니 컬렉션’은 제1권 <세계공화국으로>에서 11권 <자연과 인간>, 그리고 곧 나올 <트랜스크리틱>까지 10권이 넘는다. 이 중에서 제5권 <근대문학의 종언>이 약 4000부, 제10권 <세계사의 구조>가 3000부 정도 나갔다. “슬로베니아학파 총서와 가라타니 책들이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기둥”이라고 조 대표는 말했다. 가라타니를 기획·번역한 사람은 기획위원인 비평가 조영일씨.

 

조 대표는 “얼마 전 어느 국문학자가 관련 분야 논문을 조사해 보니 인용 빈도 1, 2위가 가라타니와 지제크였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며 그들을 본격 소개한 출판사로서 자부심을 나타냈다. “그런데 예전엔 원저자에게 주는 저작권료가 지제크는 1000~2000달러면 됐는데 유명해진 요즘엔 1만달러나 돼 우리 같은 출판사는 더는 지제크 책을 낼 수 없다. 과당경쟁 때문인데, 그 정도 액수라면 차라리 다른 책 서너권 내겠다는 생각이다. 인문·학술 서적 저작권료는 보통 권당 1000유로나 1500달러, 15만엔 정도 하는데, 그래도 가라타니는 그 정도 수준으로 도서출판b에서만 책을 내겠다고 했다.”

 

도서출판b는 5인 기획위원회의 역할이 크다. 조 대표와 동갑으로 헤겔 전공자인 이신철 기획위원은 칸트 , 헤겔, 현상학, 마르크스 사전을 냈고 곧 나올 <니체 사전>으로 완간될 5권짜리 현대철학사전을 기획하고 번역했다. <헤겔> <헤겔의 서문들> 등 헤겔 총서도 세 권째 낸 이씨는 “헤겔 전집에 준하는 걸로 만들겠다”고 했다. 도서출판b는 이들 기획위원 중심으로 짜인 총서 시스템이 강점이다.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의 <규방철학> 등을 번역한 이충훈씨, 야코프 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등을 번역한 정지은씨도 기획위원이다. 조 대표는 “우리 기획위원들은 대단한 역량을 지닌 실력파들이고 다들 어학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며 “그런데 모두 (유학을 가지 않은) 국내파”라고 했다.

 

<인간실격> 등을 쓴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 작품도 또 다른 시리즈다. 총 1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상근자는 조 대표와 백 편집장, 김장미 관리팀장, 이석환 편집자가 전부다. 아침 10시에서 오후 6시까지 하루 7시간 근무 체제다. “토·일요일과 국경일은 논다. 왕년의 (노동) 현장 출신자로 그때 기억들을 갖고 있기에, 월급 충분히 주지 못하고 다들 투자한다는 생각에 몸으로 때워도 그것 하나만은 분명히 지키고 있다.”

 

“우리는 그래도 빚이 없고 거래대금도 미루지 않고 다 처리한다. 채산만 따진다면 낼 수 없는 책들도 많이 냈다. 지금 문 닫아도 여한이 없지만, 쉽게 문 닫을 것 같지도 않다. 여유를 갖고 편하게 하고 싶은 일 하고 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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