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 그 입, 그 사지로,
검은 인간 표범은 자신의 아름다운 먹이에게 달려들었다.”
1. 이 책을 발행하며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일본 최초의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활약상을 16권으로 집대성하는 ‘아케치 고고로 사건수첩’의 여덟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1934년 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2회 휴재를 하며 <고단구락부>에 연재되었다. 구로이와 루이코의 <괴물>과 무라야마 가와타의 「악마의 혀」에서 착상을 빌려 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는 괴담으로 출발했으나 결국 <거미남>(‘아케치 고고로 사건수첩’ 3권) 이후 각광 받은 모험 활극으로 완성되었다. 이 소설에는 ‘에로그로’의 시대상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소설의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어느 겨울 밤, 히로코가 일하는 카페 아프로디테에 온다라는 기괴한 사내가 나타난다. 두 눈에 푸른 광채를 띠고 돌기가 돋은 거무죽죽한 혀를 날름거리던 짐승 같은 사내는 히로코를 납치하고, 이를 추적하던 연인 가미야 요시오는 온다의 소굴에 갇혀 그녀가 살해당하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1년 후, 새로운 연인인 레뷔 가수 에가와 란코가 또다시 온다의 표적이 되자 가미야는 아케치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무참히 살해당하고, 그 촉수는 아케치의 부인 후미요에게까지 뻗친다.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는 반인반수와 맞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까.’
란포의 이 소설은 일본 장르문학, 그중에서도 탐정소설과 추리소설, 모험 활극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일본에서 그 장르를 창조하다시피 한 작가의 작품만이 줄 수 있는 기원적인 재미를 줄 것이다.
2. 지은이 소개
■ 지은이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1894~1965)
일본 미에(三重)현 출생.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郎).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에서 착안한 필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국내외 추리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영미계 탐정소설에 심취하였으며, 1923년 <신청년>에 단편소설 「2전짜리 동전」을 발표함으로써 추리작가로 데뷔했다. 1925년 「D자카 살인사건」에서 첫선을 보인 탐정 아케치 고고로가 큰 인기를 얻자 꾸준히 그가 등장하는 소설을 집필했다. 본격 추리소설 외에 괴기와 엽기, 에로티시즘, 환상성, 초자연성, 잔학성 등이 부각되는 작품들을 쓰는 한편, ‘소년탐정단’ 시리즈 등도 꾸준히 발표하여 성인 독자는 물론 어린 독자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에도가와 란포가 평생에 걸쳐 쓴 작품들은 그 자체가 일본 추리소설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창작 활동 외에도 평론 등을 통해 해외 추리소설을 일본에 소개하였으며, 일본 탐정작가 클럽을 창설하고 ‘에도가와 란포 상’을 만들어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등 일본 추리소설의 저변을 크게 확대시켰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그는 명실상부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서 칭송받고 있다.
■ 옮긴이 이종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육공학과를 졸업하고, 키노에서 기자로 일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에서 예술전문사를 취득했고, 「90년대 한국, 그 욕망의 투사」(<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수록) 등 한국영화를 다룬 글을 썼다.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한일번역을 전공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죽음의 가시>(시마오 도시오) 등이 있다. ‘아케치 고고로 사건수첩’ 전 권을 번역하는 중이다.
3. 본문에서
“작은 동물이 집요하게 공격하자 온다는 또 격정적으로 발을 굴렀다. 양쪽 발을 교대로 차며 두 손을 가슴 앞에 꽉 쥐었다. 가미야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틀림없이 아까처럼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이 섬뜩한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그 모습을 보고 벌벌 떨며 줄행랑치겠지만, 개였기에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맹렬히 덤벼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가미야는 그때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19쪽)
“그 후 약 30분간 가미야는 무엇을 보고 들은 걸까.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세상의 온갖 음습한 것, 참혹한 것, 외설적인 것, 모든 색채와 동작과 음향이 그의 뇌수를 표백하고, 눈을 멀게 하며, 귀를 막았다.
마침내 지나치게 흥분한 온다가 격정의 여파를 해소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그 뒤로 인간의 형태를 잃고 반짝거리는 빛이 어지러이 흩뿌려졌다. 한 여성의 혼이 유례없는 고통 속에서 승천한 것이다. 이로써 가미야는 연인의 혼과 육체를 모두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떠나보내고 말았다.” (43쪽)
란코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상대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와 공처럼 굴러 흰 타일이 깔린 욕실로 들어갔다.
“우하하하……, 이젠 독 안에 든 쥐네. 알았나. 이 욕실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다시 말해 너는 내 주문에 걸려든 거야.”
야수의 벌거벗은 검은 육체가 네발로 기어 어슬렁어슬렁 타일 계단을 내려왔다.
어느새 란코는 욕조에 머리까지 담그고 있었다.
인간 표범은 쥐를 희롱하는 고양이처럼 바로 습격하지 않고 타일 세면장에 웅크려 고개를 숙인 채 푸른빛이 발산되는 눈으로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물속의 먹이를 노려봤다. (114~115쪽)
아케치 일행은 군중들 뒤쪽의 약간 높은 장소로 가서 천막 지붕 경사면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체포극을 감상했다.
시커먼 양복 차림의 인간 표범은 그의 본성인 사족보행으로 광활한 흰 텐트 천을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하지만 추격자 중에는 야수 못지않은 곡예의 명수가 두세 명 있었다. 더군다나 도망자는 한 명, 추격자는 열 명 가까이다. 제아무리 인간 표범이라도 서서히 지붕 구석으로 몰렸다.
“저놈도 슬슬 운이 다했나 보네. 뛰어내릴 건가. 그게 아니면…….”
쓰네가와 경부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그의 생각을 알아맞히기라도 하듯이 검은 표범은 지붕 끝에서 멋진 도약을 했다. (269쪽)
4. 지은이의 말
“<고단구락부> 1934년 5월호부터 이듬해 5월호까지 연재했다.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여러 번 썼기에 이번에는 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는 괴담을 쓰려했다. 역시 일관된 줄거리를 충분히 생각지 않고 써서 전체적으로 완결성이 부족한 감이 있다. 매달 집필하면서 어떤 달은 좀 흥미로운 이야기가 떠오르는가 하면 어떤 달은 너무 시시한 이야기만 떠올라 내 고질적인 문제가 노출되었다. 하지만 당시 오락 잡지들은 이런 유치한 읽을거리를 원했기 때문에 내 장편은 꽤 수요가 많았다.”
5. 옮긴이의 말
“처음부터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까닭에 다른 소설들에 비해 트릭이나 추리 요소가 적은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인간 표범의 정체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비밀은 최후까지 밝혀지지 않고 그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가는 여러 가설로만 남을 뿐입니다. 오우치 시게오나 등 여러 평론가들은 그런 모호한 결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결점이라고 지적하는데, 신보 히로히사는 이 소설이 연재된 시기에 군부의 비상체제가 강화되어 ‘에로그로’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기에 암시로 끝냈을 것이라고 변명해 주면서도, 그 이상 자세히 밝히면 너무 황당무계해지기에 자제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밝힙니다.
‘에로그로’란 에로틱과 그로테스크의 합성어로 쇼와 초기의 문화 풍조를 가리키며 1929년 대공황 이후 2·26 사건이 일어났던 1936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마술사> 서두에서 매일같이 끔찍한 사건들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다는 서술처럼 이 시기에 실제로 엽기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신문사들은 경쟁적으로 선정적인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대중문화에서도 이런 경향을 띤 작품들이 큰 인기를 얻어 주류를 차지하게 되지만,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쿠테타인 2ㆍ26 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군부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에로그로’에 대한 탄압은 심해집니다.
<음울한 짐승>으로 엽기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에도가와 란포는 검열로 인해 이런 작품을 더 이상 쓰지 못하자 <괴인이십면상>을 비롯한 소년 탐정물로 전향했습니다. <흡혈귀>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고바야시 소년이 소년탐정단을 이끌고 아케치 탐정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소년탐정단 시리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