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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모순

시리즈 b판시선 068
출판일 2024-04-02
저역편자 윤재철 시집
출판사 도서출판 b
가격 12,000원
도서규격 반양장본ㅣ124 x 194mm l 167쪽
ISBN 979-11-92986-21-0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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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모순_앞표지.png

 

 

“극한의 생태적 위기 속에서 모색하는 여리고 따뜻한 시선”

 

 

1. 이 책을 발행하며

 

윤재철 시인의 열 번째 시집 <따뜻한 모순>이 출간되었다. 4부로 나뉘어 62편의 시가 묶였다. 여기 실린 시들은 현재 지구의 생태적 상황을 극한의 위기 상태라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쏟아내는 언론 매체들에서 다루는 생태 환경 관련 기사들, 기후 위기, 온실가스, 지구 온난화, 폭염, 폭우, 혹한, 극지방 해빙, 동식물의 멸종 위기 등등에서 관념적으로 느껴질 수 있던 위기 의식은 잘 씌어진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더욱 실감이 드러난다. 

 

“아마 그럴 것이다 / 둘이 함께 사막길을 걸어갔다면 / 한낮에 뜨거운 모래밭을 / 등에 가득 짐을 싣고 / 목마르게 걸어갔다면 // 사람이 낙타의 얼굴을 / 주먹으로 가격하는 일도 / 낙타가 사람을 쓰러뜨리고 / 물어뜯는 일도 /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낙타에게 물려 죽은 한 사내」 부분)

 

인류가 농경이나 목축을 하던 시절이라면, 동물을 가족이나 친구처럼 여기던 시절이라면, 인간과 낙타가 함께 살아가면서 고통과 환희를 나누며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라면 없었을 것 같은 사건을 다룬 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 /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 세상에서 가장 별이 빛나는 사막 / 혹은 쓰레기장 // 영국에서 미국에서 한국에서 / 대서양 건너 태평양 건너 / 이키케 항구를 통해 들어와 / 아타카마사막에 버려진 옷 …… // 두세 번 입고 버려지는 / 수백억 벌 옷의 행방 // 옷의 무덤 / 옷의 쓰레기 산 …… // 밤이면 별을 안고 뒹구는 / 알록달록한 미라의 꿈 // 젖지 않는 옷 / 썩지 않는 옷 / 혹은 꽃 / 혹은 널브러진 날개” (「사막에 버려진 옷 혹은 날개」 부분)

 

칠레의 한 사막에 쓰레기로 싸인 옷더미는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 인구 3천만 명의 나라 가나에서는 매주 1천5백만 벌의 헌 옷이 들어와 버려진 옷들이 바닷가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소들이 옷더미를 파헤치며 풀 대신 옷을 뜯어 먹는 장면을 보여준 리포트도 있다. 잘 사는 나라에서 기부 혹은 수출의 명목으로 보내진 옷들이다. 

 

오늘날의 위기 인식에서 대부분 그 원인이 인간에게 있음을 지목한다. 위기는 원인을 초래한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인류보다 위기 대처 능력이 미약한 생명체들에게는 자그마한 생태적 변화조차 멸종 수준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즈음에 작은 새 한 마리, 풀꽃 한 송이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은 시 쓰기의 본분일지도 모른다. 

 

“찔레꽃 소담스레 피어 있어 / 꽃 무더기에 / 코부터 갖다 대는데 / …… // 찔레꽃이 내게 소곤거린다 / 향기를 너무 가져가지 마세요 / 너무 그러면 벌들이 싫어해요 / 고개 들며 뒤미쳐 생각해 보니 / 나야말로 객꾼이 아니던가” (「향기를 훔치다」 부분)

 

 

2. 지은이 소개

 

윤 재 철 시인. 195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초·중·고 시절을 대전에서 보냈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1981년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메리카 들소>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세상에 새로 온 꽃> <능소화> <거꾸로 가자> <썩은 시> <그 모퉁이 자작나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온 달빛> 등과, 산문집으로 <오래된 집> <우리말 땅이름>(전 4권)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1996)과 오장환문학상(2013)을 받았다.

 

 

3. 차례

 

ㅣ시인의 말ㅣ 4

 

제1부

멧비둘기 울음소리 12

도요새의 눈물 14

낙타에게 물려 죽은 한 사내 16

나는 있지 18

따뜻한 모순 20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속을 나비가 난다 22

잠자리몽 24

개미가 나비를 끌고 간다 26

관악산 소묘 28

칡꽃 향기 30

7월의 목련 나무 31

내 마음속의 환풍구 32

한낮에 젖는 색소폰 소리 34

치잣빛 향기로 물들고 싶다 36

마른 꽃 38

딱새 한 마리 잡목 숲으로 사라지고 40

 

제2부

나비가 왔다 갔다 42

반포천에서 44

피천득 산책로 46

꽃 핀 오동나무가 내게 연애 걸다 48

향기를 훔치다 50

야쿠르트 아줌마 52

엉겅퀴꽃을 끌어안은 풍뎅이 54

장마 지나고 찔레꽃 56

소나무가 붉다 58

마른 멸치 한 마리 60

모란 씨를 찾습니다 62

봉다리 커피 64

백자 달항아리가 우울하다 66

미사일과 명품 68

보안 문서 파쇄 70

장독대 옆 채송화 72

 

제3부

하얀 이별 74

알락꼬리마도요와 칠게 76

넓적부리도요 1H 78

미스매치 80

보일러가 된 지구 82

극한 호우 84

사막에 버려진 옷 혹은 날개 86

희생 88

꼬리명주나비와 까마귀오줌통 90

물총새, 돌아온 것일까 92

삼한사미 94

한겨울에 꽃 핀 아몬드 나무 96

전기 모기 채 98

어느 날 뉴스 속보 100

언제쯤 이 도시는 익어 갈 수 있을까 102

 

제4부

명품리 106

따순구미 108

철새들의 간이역 격렬비열도 110

흑산도는 허브 공항 112

해운대 간비오산은 큰나루산 114

산제비의 노래 116

설악산 울산바위 118

돌아서라도 가야 하는 도라산역 120

진목마을은 참나무쟁이 122

뗏목다리 벌교 124

아라가야 머리산 126

과천 뒤쪽의 방배리 128

할미산이 대모산으로 130

조운흘과 몽촌토성 132

사댕이고개 134

 

ㅣ시작 노트ㅣ 무정천리 눈이 오네 137

 

 

4. 본문에서

 

 

<낙타에게 물려 죽은 한 사내>

 

 

아마 그럴 것이다

둘이 함께 사막길을 걸어갔다면

한낮에 뜨거운 모래밭을 

등에 가득 짐을 싣고

목마르게 걸어갔다면

 

사람이 낙타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일도

낙타가 사람을 쓰러뜨리고 

물어뜯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가 아니라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뜨거운 모래바람 불어가는 

고비사막을 둘이 함께 

목마르게 걸어갔다면

 

러시아 시베리아의 한 레크리에이션 센터 

왜 낙타는 눈 위에 혼자 서 있었을까

왜 경비원은 가만있는 낙타에게 다가가

고삐를 낚아채며 안면에 펀치를 날렸을까

 

또 낙타란 놈도 그렇지

화가 났더라도 침이나 뱉으면 됐지

CCTV 켜 둔 마당에서 사람을 쓰러뜨리고 

피가 낭자하게 물어뜯었을까

 

어쩌다 원수처럼 마주친 운명이라도 

한낮에 뜨거운 모래밭을 

둘이 함께 목마르게 걸어갔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 * * * *

 

<알락꼬리마도요와 칠게>

 

 

암꿩 크기의 몸집으로 

길게 아래로 굽은 부리에 

다리도 부리만큼이나 길고 늘씬해

우표에도 찍혀 있는 알락꼬리마도요*는

 

게 구멍을 뒤져 작은 게들을 잡아 

다리는 떼어내고 몸통을 삼키는데

끝부분이 아래로 휘어진 부리는

비스듬히 깊은 칠게의 구멍에 딱 맞는단다

 

봄 오월 짝짓기할 때면

네 쌍의 다리를 쭉 뻗어 몸을 높이고 

한 쌍의 긴 집게발은 만세 운동을 하듯 

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갯벌 위에서 군무를 추는 칠게는

 

가느다랗고 긴 눈자루 2개로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다

순식간에 제 굴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데

알락꼬리마도요가 굽어진 부리를 쑤셔 넣으면

꼼짝없이 끌려 나올 수밖에 없단다

 

사람도 좋아하고

낙지도 좋아하는 

춤추는 칠게를

도요새는 절대로 사랑해

 

남반구 호주에서 월동한 뒤 

봄이면 쉬지 않고 12,000km를 날아와 

1kg 몸무게가 반으로 줄어든 알락꼬리마도요는

서해 갯벌에서 실컷 칠게를 먹지 못하면

다시 8,000km를 날아 번식지인 시베리아로 

날아갈 수가 없단다 

죽을 수밖에 없단다

 

* * * * * *

 

<명품리>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에 있는 명품리는

원래 이름이 품실 

일제가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위 부락은 상품리로 

아래 부락은 하품리로 나누면서 사달이 났는데

 

상품리 이름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하품리 이름은 영 마뜩잖아

애써 농사지어 가락시장에 내다 팔 때면

마을 이름 때문에 영 하품 취급 받는 것 같고

흥정이라도 할라치면 영 하품 나온다는 소리 듣다 보니 

억울하고 자존심 상해

마을 이름을 명품리로 바꾸어 버렸다

 

품실이라는 원래 마을 이름도

옛날에 이 마을에 삼정승이 났다고 하여 

품실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지만

품은 벼슬을 일컫는 품品이 아니라 

순우리말 품

엄마의 품이 그립다 할 때의 그 품

품실은 주변의 산이 

마을을 사람의 품처럼 감싸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

 

땅이 엄마의 품처럼 따뜻하고 아늑하다면

그런 명품이 어디 있으랴

그런 명당이 또 어디 있으랴

정승 벼슬보다 백번을 낫고말고

 

 

5. 시인의 말

 

폭우 속에

벤치 밑

제비꽃은 목마르다고 한다

제비꽃에 알을 낳는 

은줄표범나비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이제는 

조금 겸손해지고 싶다

검소해지고 싶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북극곰을 위해서

고비사막 낙타를 위해서

 

슬픔이 해일처럼

푸른 별을 덮을지라도

딱새 한 마리

가슴에 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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